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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안아봐도 돼요?

내가 막걸리를 끊을 수 없는 이유

by 설작가

주말 저녁은 늘 아내와 한잔~

아이들도 오며 가며 안주를 집어 먹다가

먼저 들어가 자겠다며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큰애 방에 들어갈 일이 있어

아내는 조용히 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고

방에서는 큰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금 뭐 하고 있었어?"


"지금까지 계속 이랬던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


자겠다고 들어간 아이는 누워서 패드를 보고 있었고

그 장면을 본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내가 화를 낸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아이의 눈 건강 걱정.

드림렌즈(시력 교정을 위해 수면 중 끼는 렌즈)를

착용하는 윤이가 렌즈를 끼고 패드를 보면

시력이 악화될 수밖에 없어 걱정이 컸던 것.

시력이 나빠 고생하고 있는 아내는

눈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안타까움이 훨씬 컸을 게다.


둘째는 거짓말.

윤이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자겠다고 들어간 아이 방 불이 늦게까지 켜져 있는 걸

여러 번 봐왔지만 그냥 모른 체 넘겨줬었다.

눈앞에서 사실을 확인하니 눌러왔던 감정이...


아내는 더 이상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만 덩그러니 거실에 남겨졌다.


'아...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나...'


조용히 윤이 방으로 들어가니 윤이가 울고 있었다.


"아빠, 너무 억울해요~~"


윤이는 드림렌즈를 끼고 들어와서

패드를 본 건 처음이었고

그것도 자기 전에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자려고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걸 본 거라고 했다.

엄마가 오해해서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다며

윤이는 엉엉 울었다.


불 꺼진 방에서 윤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알았다. 엄마가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하겠다.

우리 가족 장점이 뭐냐.

대화 많이 하면서 푸는 거 아니냐.

윤이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스스로 떳떳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거다.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 될 건 아니다.

엄마 아빠도 다 그렇게 산다.

하지만 윤이 눈 건강은 정말 중요하다.

엄마도 윤이 눈 걱정이 돼서 그러셨던 거다.

윤이는 정말 잘 자라주고 있다. 걱정 말고 잘 자라.


이번엔 아내 방으로 들어가 윤이 입장을 잘 전달했다.

아내는 윤이의 첫 반응에 흥분을 했던 것 같다.

윤이의 첫마디가

"저 아직 게임시간 남았는데요~"였단다.

하지만 아내는 역시 대인이었다.

"윤이가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네~"

어른스럽게 그마저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사태는 잘 수습되었고, 난 다시 거실로 나와

남은 술을 홀짝 거리며 방금 벌어진 일을 복기했다.


다음날 저녁.

야구레슨을 받고 들어와 다음날 먹을 수육을 삶았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수육이 완성됐고

난 또 수육 맛을 본다는 핑계로 막걸리를 꺼냈다.


아내와 둘째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난 또 영혼의 단짝 윤이를 불렀다.


"윤아~ 갓 삶은 수육 맛 좀 볼래?"


윤이도 오늘따라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앞에 앉아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아빠, 어제 아빠가 제 방에 들어와 줘서 좋았어요.

어젯밤에 아빠랑 얘기하고 후련해져서 잘 잤어요."


"그랬어? 오늘 괜찮았어?"


"네. 좋았어요. 그리고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무슨 말?"


"우리 가족은 대화를 많이 하니까

오해가 쌓이지 않는다는 말이요."


참... 고맙고 대견하구나...


영혼의 단짝 술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니

오늘따라 술맛이 좋았다.


잠시 후 윤이가 말했다.


아빠, 한번 안아봐도 돼요?


난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일어나 두 팔을 벌리니 윤이가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느새 아빠보다 커버린 중학생 아들과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라니...

우리 둘은 한참을 안고 있었다.

이 행복감을 오래 느끼고 싶어서,

차오른 눈물이 다시 들어갈 때까지...


내가 막걸리를 안 깠으면 이런 감동도 없었을 것...

막걸리를 끊을 수 없는 이유 하나가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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