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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Mar 15. 2018

20. 아주 쓴 오르체타

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이번에 스페인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외면하고 싶었지만 가장 많이 봐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노숙자들이었다. 7년 전 스페인에 방문했을 때도 이렇게 많은 노숙자들이 존재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때도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번화가 골목마다, 건물 귀퉁이마다 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가 확실히 늘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스페인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 보여진다. 거리에 나와 구걸을 해야지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극빈층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계속 신경이 쓰인다. 가끔씩 ‘사실은 거지가 아니다’, ‘계속 해오던 일이라 먹고 살만 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일하기 싫어 저렇게 사는 것을 우리가 도울 필요가 없다’ 등등의 말을 하며 돈을 건네려는 내 행동에 핀잔을 주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소수의 노숙자들이 설령 거짓으로 구걸을 해도, 그래서 내가 건넨 돈을 받는 사람이 날 호구로 취급한다 해도 난 내가 하려던 행동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나의 행동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고작 동전 몇 개로 누군가를 돕겠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한 묘안을 찾아내고 싶지만, 내 부족한 능력으로는 어떤 뾰족한 수를 생각해낼 수 없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태로 이런 류의 생각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 왔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숙자였을까? -> 그렇진 않지 않을까? -> 그럼 삶의 어떤 시점에서 어떤 이유로 가족과 집을 잃고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일까? -> 그들 자신의 문제였을까? -> 가족의 문제였을까? -> 시스템의 문제였을까? -> 시스템의 문제라면 왜 그들만 거리로 나오고 나는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 나도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이니, 그들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그들이 게으른 나머지 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거리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 그럼 단순하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말로라 생각하며 그들의 지금 상황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 아니지 않을까? ->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애처로움에 던지는 행인들의 동전 몇 닢으로 그들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인가? -> 그렇다면 국가는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는 중인가? 무시하는 중인가? -> 도우려 노력하는 중이라면 왜 그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는가? -> 무시하는 중이라면 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 사람들의 외면과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버틴 것에 감사하며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인가? -> 그렇게 삶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나아질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 것일까? -> 끝끝내 그런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은 그냥 거리에서 끝나는 것인가? -> 그렇다면 그들의 그런 말로에 아무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 그들은 그저 그렇게 살다 갈 운명이었던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반복되어 한번은 내 머릿속 바깥으로 이 생각을 꺼내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니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공유를 하게 된다면 이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와 어쩌면 그들이 적절한 도움을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노숙자들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문제만으로는 누구도 절대 그런 벼랑 끝의 상황에 놓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난 이상 기본적으로 국가가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가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국가의 시스템적 오류 혹은 맹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불법체류자이거나 난민인 경우 그들이 현재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선 법적으로 그들을 책임질 의무가 없는 것이니 그 사람들까지 이 범주 안에 넣어 생각할 순 없다. 그들과 관련된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지금 나는 한 국가의 국민이 어쩌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고 해결하려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재미있게 놀러 와서 왜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면 어떨까 싶다.  내게 여행이란 것은 남은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선택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 하나 일 뿐, 이 선택이 다른 선택들보다 특별히 더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삶에 어떤 것도 즐겁기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 배우는 것인지가 중요한데,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선 하지 못했던 다소 복잡한 생각들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거리에서 살게 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고, 그래서 이 부분에 이런 글이 쓰여지게 된 것이다.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면, 나는 이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에 반대한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나라님도 구제를 못하니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차원의 뜻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구제를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즉, 애초에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어려워 못 푸는 문제이니 그냥 덮어두고 내 살길이나 생각하며 사는 것이 맞는 일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스페인에 유명한 음료 중 ‘오르체타’ 라는 것이 있다. 학원 사람들과 오르체타를 파는 유명한 가게에 가서 그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던 때였는데, 그 가게 바로 맞은 편에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더 이상 마를 수 없을 만큼 야윈 몸으로 앉아있던 한 여성이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잘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음료를 기다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고, 그녀는 무엇을 잘못해서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가 동전 하나 던져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일까? 내 돈 내고 내가 사먹는 것이니 돈 없는 사람은 그냥 바라만 보는 게 맞는 이야기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방안에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차마 그녀 앞에서 오르체타를 홀짝일 수 없었다. 동전 지갑 안에 있던 동전 몇 개를 종이컵에 넣은 후 그 가게를 벗어나서야 음료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엄청 달콤한 음료였는데 기분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잘못을 한 건 절대 아니지만 그녀로 인해 좋았던 내 기분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좁게는 그녀와 나, 넓게는 그들과 우리가 서로를 떨어뜨려 놓고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관계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쪽 면으로만 보면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의 선한 행동이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도움을 어떻게 전해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부분을 잘 모른다는 것에 있다. 당장에 느껴진 안타까움에 천원 한 장 건네는 것이 그들에게 과연 얼만큼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만원을 건네면 좀 더 도움이 될까? 나 혼자 십 만원을 건넨들 과연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불특정 소수의 사람들이 불규칙적으로 건네는 성의 혹은 도움은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돈으로 오늘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한들 그것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는 말인가?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그들이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한 보조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덜 잘사는 사람은 있어도 아주 못사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못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머지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놓고 세금낭비라며 왜 우리 돈으로 게으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경우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며 내게 비난의 화살을 쏘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실 이것은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니, 세금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이런 이슈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차분하게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그들은 돕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유럽에 있다 보니 알게 모르게 테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예전에 유럽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경비가 매우 삼엄해졌고, 지난 사건들로 인해 아무런 일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연중에 계속 신경이 곤두서있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특정 종교와 관련된 복장의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고, 어쩐지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을 슬금슬금 피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나부터도 테러의 원인을 종교와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종교라는 것은 사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다. 한 번 해보면 두 번 하기는 쉬워진다. 구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타인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졌을지도 모르지만 하루 이틀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 일이 반복되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희들은 즐거워 보이는구나?’ 라는 생각에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인생에 대한 불만도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삶이 중요할 수가 있을까? 나아가 그들이 도움을 청하는 자신을 외면했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쌓은 상황이라면? 그런데 그때 어떤 이가 나타나 필요한 도움을 주며 함께 하길 원한다면?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속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과연 중요할까? 당장에 고픈 배를 채워주고 안전하게 살 곳을 제공해주는데?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무시했으면서 모두를 위해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어떻게 강요할 수 있을까?  


모든 노숙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생각보다 엄청 위험하고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뿐이다. 2007년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해당 학교 학생이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범행 전 범인이 직접 남긴 영상에 서슬 퍼렇게 찍힌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그의 표정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정황과 그가 남긴 유언 영상으로 말미 암아 우리는 그의 행동이 그의 결핍된 사회성이나 정신 이상에서만 기인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행된 인종 차별과 학내 폭력도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엄청난 일을 자행한 것은 맞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피의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주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는 이 총기 난사 사건과 곳곳에서 자행되는 크고 작은 범죄들은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의 어긋난 선택. 그리고 그것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고 우리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던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돕는 것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모두가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즉, 어떤 형태의 위기든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개인이나 특정 단체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 국가가 나서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어떤 정치인이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상할 수 있지만 나는 이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부의 재분배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당장 오늘 잘 곳이 없는 사람들, 며칠 째 한끼도 먹지 못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금은 그런 곳에 쓰여지기 위해 거두는 것이라고 배웠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머릿속에 맴돌기만 했던 여러 가지 생각을 하염없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니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두통과 위통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멀쩡하다. 많았던 생각 중 대부분은 내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내 자신과 관련된 생각 말고도 꽤나 다양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만 잘 산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정리가 되니 한결 가벼워진 삶을 사는 기분이 든다.  


우겨서라도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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