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 어쩌다 ‘어쩌다 어른’이란 프로를 보게 되었다. 김창옥이란 분의 강연이 있던 날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시청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본 순간엔 ‘많이 놀았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놀았는데, 시집 완전 잘 갔어! 남편은 걔가 그렇게 놀고 다닌 거 알까?”
강연은 이런 맥락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가 말하길 한 때 놀았던 그녀들이 더 잘사는 이유는 놀 것을 다 놀아서 더 이상 놀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가정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하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는 이 얘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대학 때 만난 내 친구 중 한 명이 이런 케이스이다. 이 친구가 뭐 불량하게 놀았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고, 이 친구는 그저 학창시절에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보았던 그런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격 또한 화끈해서 겉으로 봤을 때는 ‘무서운 친구’로 보일 가능성이 있지만 무서운 친구는 전혀 아니고 그저 과하게 활발한 친구일 뿐이다. 어쨌든 이 친구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이 논’ 친구이다. 그리고 결혼해서 가장 잘 사는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어느 날 이 친구는 태안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그냥 이제 그런 것이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것은 재미가 없다고.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 나온 웃음이 아니라 어떤지 대견하고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놀았다더니 (본인과 그 친구의 친구들 얘기를 조합한 결과) 이젠 웬만한 것에선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 웃음이 났던 것 같다.
김창옥씨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놀았던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이유는 사실 더 이상 놀 것이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을 더 잘 사는 것이라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는 이야기였다. 원하는 것을 알아야 놀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난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수학의 정석과 성문 영어를 보며 공부를 하니 나도 어쩐지 그 책들을 펼쳐 놓고 공부라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진짜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왜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인지 알았다면, 혹은 대학에 가는 것 말고 하고 싶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 소중한 시간을 무언가를 하는 척 하며 낭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한국엔 나와 비슷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볼 시간도 없었고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해야 하는 것만 많았던 그 시절엔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주한 현실엔 불만이 많은 상황. 불만을 표출하니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해도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짜증만 더 나는 상황.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씁쓸한 현상이다. 그런데 또 웃긴 것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도 이런 상황이 짜증나긴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던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내겐 크고 작은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춘기가 이제서야 찾아 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커졌고 사람들에게도 과하게 예민하게 굴었던 시기였다. 그 시절 내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막상 그것을 하려고 하니 그것을 할 수 없게 막는 요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20-30대는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보낸 시간으로 꽉 찼었고 현재도 그런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했고 그것을 막는 모든 것을 넘어서려고 갖은 애를 썼다. 결과적으로 그 과정은 매우 험난했지만 현재 나는 별다른 후회 없이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니 피곤했던 지난 날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들 대학에 가니까, 졸업을 하니까, 취직을 하니까, 결혼을 하니까, 출산을 하니까 애를 낳고 기르다 보니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어떤 것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거나 ‘내가 하고 싶다’ 라는 생각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선택엔 자신의 의지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그 의지라는 것에 내 지분이 얼만큼 들어있는 것인지 나조차도 잘 모른다는 게 문제이다. 간혹 결혼을 하고 혹은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들의 이런 의지는 ‘이기적’이란 단어로 매도될 때가 많다.
‘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결혼 전에 했어야지’
‘아기 키우는 사람이 무슨 자기 욕심을 챙기려고 하나’ 등등의 시선이나 조언이 그들의 선택을 방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조언이랍시고 쏟아내는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의 엄마들은 유독 자신의 꿈과 관련된 문제에 참 자신이 없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되어버린다. 나는 이 과정이 너무 슬프다. 엄마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 그것을 알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 우린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자신을 쉽게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자식의 인생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함께 응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