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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Mar 15. 2018

26. 열정의 또 다른 이름, 플라멩고

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스페인 여자 아이는 발걸음 소리가 매우 크다. 강아지가 식구 오는 소리를 알아 차리듯 나도 이 여자 아이가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알아 차릴 수 있다. 조심성이 없는 이 아이의 특징이겠거니 했는데, 오늘 플라멩고 공연을 보고 와서 알았다. 그것은 함께 살고 있는 그 아이만의 특징이 아니라 어쩌면 스페인 사람들 모두의 특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온 몸에 엄청난 비트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4명의 남성이 난생 처음 듣는 멜로디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주 생소한 멜로디였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날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모르는 언어로 노래를 했기 때문에 가사의 내용은 알 길이 없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를 분출하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 때문이었는지 내 가슴 또한 사무치게 아려왔다.  


박자는 상자처럼 생긴 타악기와 박수 소리로 맞췄고 멜로디는 기타가 담당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에너지가 폭발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지 정말이지 한 순간도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공연을 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오늘의 주인공, 뜨겁다 못해 타 들어 갈 것 같은 눈빛의 그녀가 등장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강렬한지 숨소리도 내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눈빛만이 아니었다. 신발에 스피커를 달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춤을 추며 내는 그 발소리가 얼마나 큰지 심장이 몸을 뚫고 이미 밖으로 튀어 나온 느낌이었다. 사람의 혼을 쏙 빠지게 하기 충분한 빠른 속도도 놀라웠지만 박자를 갖고 노는 것 같았던 그들의 몰입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진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공연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었다. 바르셀로나가 플라맹고의 본고장도 아니고, 내가 방문한 공연장은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곳이라 authenticity를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광객을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공연을 할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옆에 앉은 일본인 관광객과 몇 마디 나누게 되었을 때도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의무적으로 봐야만 할 것 같아서 왔을 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아주 시큰둥하게 말했던 나였다. 그런데 30분이 조금 넘는 길지 않는 공연 시간 동안 받은 감동이 얼마나 컸었는지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았을 무렵엔 눈물과 탄성으로 범벅이 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옆에 앉은 일본인에게 공연 전에 했던 말은 취소라며 내가 한 말은 기억 속에서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정열적이다.  


익히 많이 들어 본 이야기라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정열이란 단어만큼 스페인 사람들을 알맞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현재 몰입하고 있는 무언가에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는 대단한 크기의 열정이 스페인 사람들 모두에게 녹아 있는 것 같다. 나도 나름 열정적으로 삶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나였지 싶다. 지금 보다 더 뜨거운 온도로 내 삶에 직면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아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서려있는 한을 최대한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분출하려고 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슬픔을 슬픔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는 자세도 함께 배워간다.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에 감명을 받았지만 이 공연으로부터 받은 감명은 그 기운이 좀 더 오래 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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