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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Mar 15. 2018

28. 짧은 핀란드 이야기-1

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핀란드는 추운 나라가 맞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들린 4월 초의 어느 날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5월의 전날, 핀란드에선 이렇게 만 이틀을 머물렀는데 하루는 비가 왔고 또 하루는 눈이 왔다. 눈 폭풍이 얼마나 요란하게 몰아치는지 거리를 지나갈 때 육성으로 비명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아무리 북유럽이라지만 5월의 눈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싶은데 그들은 그렇게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과 방향을 잃고 날리는 눈 폭풍을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맞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나도 춥지 않다는 듯. 


사람들은 흔히 북유럽 사람들을 ‘차가운 민족’ 이라 부르며 그들의 냉정하고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곤 한다. 나도 헬싱키에 오기 전까진 비슷한 선입견으로 표정부터 차가워 보이는 이들에게 과연 길이나 제대로 물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날씨가 차가운 곳이지 차가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날이 추우면 표정이 환하거나 밝을 수는 없다. 날씨가 추우면 몸부터 웅크려지는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이들의 표정이 차가워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에서 느낀 신기한 점은 내가 말을 걸고 질문을 던졌던 모든 사람의 표정이 내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서울 깍쟁이 인 줄 알았는데 산골 소녀 같은 표정으로 내게 길을 알려주고 가끔은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술술 해주었던 사람들. 이곳의 사람들은 날씨와 다르게 참으로 따뜻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사우나’ 


핀란드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사우나이다. 매우 따뜻한 장소, 사우나. 문득 이들이 사우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타인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추우니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런 연유로 사우나도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에게 베푸는 친절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기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들의 영롱한 눈빛엔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은 비록 춥지만, 서로에게 따뜻함을 전해준다면 그런 날씨 정도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 같은 것이 있어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핀에어를 이용하면 경유지인 헬싱키에서 최대 5일간 스탑 오버가 가능하다. 그래서 나도 한국으로 가는 길에 하루 동안 헬싱키에 머물며 그곳을 둘러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숙소를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스페인에서 불어난 짐의 양이 너무 거대해서 먼 곳까지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고 그곳에서 여행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호텔을 잡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바로 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새벽 4시에 헬싱키에 도착하는 비행시간이었다. 간이 콩알만한 나로서는 대중교통을 전혀 이용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시간에 택시를 이용해 어둠을 뚫고 호텔로 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동이 틀 때까지 공항에서 노숙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 뻥 뚫린 공간에서 30분 이상 연속으로 잠을 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어둠이 가시자마자 공항 셔틀 버스에 올랐다. 아주 이른 아침이니 체크인은 당연히 안 해주겠지만 짐은 맡아 줄 테니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호텔 로비에서 인터넷을 하며 하루 동안의 동선을 짜고 시내로 나갈 요량이었다. 


셔틀 버스에서 내려 생각보다 매섭게 부는 바람을 가르고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호텔 로비는 텅 비어 있었고 나는 그저 빈 의자에 앉아 휴대 전화를 충전하며 인터넷에 집중할 뿐이었다. 가족들에게 호텔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도 다 끝냈고, 하루 동안의 계획도 다 짰고, 한국의 뉴스까지 다 확인했다. 이제 더 이상 로비에서 할 일이 없었다. 여전히 매우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짐을 맡기고 시내로 나가 강제로 관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화장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초췌한 얼굴로 뚜벅뚜벅 프론트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전 오늘 여기 머물 투숙객입니다. 제가 너무 일찍 도착했죠? 체크인 시간이 아직 안됐으니 체크인을 하려는 건 아니고, 짐이 너무 많아서 짐을 좀 맡기고 나갈까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요?”  


너무 일찍 그곳에 도착한 느낌이 들어 괜히 이런 저런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직원은 우선 내게 환영한다고 말한 후 여권과 이런 저런 정보를 확인하더니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짐 맡길 필요 없이 그냥 지금 체크인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순간적으로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되물어 보았다.  


“아직 체크인 시간 한 참 남았는데, 지금 체크인 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라고 질문했더니 그 직원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내가 동그래진 눈으로 좋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 직원은 내 표정에 화답이라도 하듯 장난스러운 얼굴로, 


“It’s not a big deal. (별 거 아닌데요, 뭘)” 이라고 말하며 키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오늘 폭풍우가 쏟아질 예정이니 밖으로 나갈 때 호텔 우산 꼭 챙겨가라며 눈으로 우산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어제는 날씨가 좋았는데 자기가 괜히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고작 하루 머무는데 비가 내린다는 말에 속이 상할 법도 했지만 그 순간 날씨 따윈 내 안중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날씨라도 내 기분을 이렇게 따뜻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추운 나라에 사는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선입견에 불과했다.  

단순히 일찍 체크인을 도와준 그 직원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헬싱키로 떠나는 순간부터 마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좋은 기운을 받았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항공사 직원들, 공항에서 만났던 공항 직원들, 셔틀 버스 기사님, 머물렀던 호텔의 모든 직원들, 상점의 점원들, 나의 여러 가지 질문에 성심 성의껏 대답을 해주던 그곳의 사람들, 심지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 뛰어가면서까지 방향을 안내하던 청년 등등. 헬싱키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운 날씨를 무색하게 하는 따뜻함을 전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핀란드는 추운 나라가 맞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정말로 따뜻했다.  


산타의 나라 핀란드. 산타 클로스의 푸근함은 사실 산타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핀란드 사람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지 않아도 기회를 만들어 다시금 꼭 방문해보고 싶은 핀란드. 핀란드의 진짜 매력은 그곳의 사람들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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