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반응 없는 사람이 싫었다. 게다가 나는 온갖 계산 끝에 한 행동인데, 나의 의도를 전혀 몰랐던 사람을 대할 때면 김이 포오옥 빠지고는 했다.
또는 "너 왜 그렇게 해?"라는 등의 내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보면 급 합당한 변명을 내놓았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첫 번째 정당한 이유와, 두 번째 합당한 이유 등등등...."
다 개소리다.(멍멍) 변명이고 핑계다. 너의 지적질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러다가 조금 더 강도 높은 책망이 올 경우 나는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얼마든 되어있다. 왜냐하면 나는 늘 안전빵으로 상대의 흠과 하자를 미리 찾아두고 가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문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대하기가 어려웠다. 약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만 약점을 잡힐지 모른다는 나 혼자만의 이상한 불안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대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나보다 좀 부족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물론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어쩐지 흠이 없거나, 어쩐지 흠은 있으나 기세 등등한 사람은 가까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음을 후에 깨닫게 된다.
물론 전부 그런 인간관계만 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기준으로 맺은 관계는 지속시간이 짧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럼없이 친해진 경우에는 이런 경계가 없어서인지 더욱 오랜 시간 친분을 지속할 수 있었다.
나르시시스트, 자기애성 인격장애인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 타인의 평가다. 타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정/칭찬의 말을 쏟아내면 안심하며,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면 화가 나고 낙담하게 된다.
그런 나에게 상대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는 순간은 참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상대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놀라운 희생정신을 발휘해가며 상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베풀고는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감사가 돌아왔고, 나는 그제야 내가 옳았음을, 내가 가치 있음을 발견하고는 만족했다.(그러고는 그것을 그만두었다)
또는 이런 경우도 있다. 내가 가사 노동을 잘한다던지, 요리를 잘한다던지, 자녀 양육을 슬기롭게 한다던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지.. 등등 내가 타인 앞에 인정받기 좋은 포지션들을 열심히 함으로써, 그렇게 보인 부분에 대하여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면 무척 만족해했다. 그때 드는 생각은, '아, 다행이다. 내가 옳구나.'였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평가'하는 기준 속에 살았다. '좋은 주부'라는 기준, '좋은 엄마'라는 기준, '좋은 아내'라는 기준, '좋은 동료'라는 기준,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 등등등....
이 기준의 문제점이 뭐냐면, 주변 사람이 바뀌면 내 행동도 그 사람에 맞게 다르게 '보여주기 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도 그렇게 살아서 그렇게 카멜레온처럼 잘도 변했다. 물론 후유증은 컸다.
일단 나는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꾸며진 나를 보며 인정하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꾸며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온전한 나'로써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서 나는 늘 어느 수위를 유지해야 했기에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우울해졌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가 일시에 맥이 탁 풀리며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삶이 계속된 연기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들 것이며,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니 얼마나 예민해지겠는가? 그러니 어느 순간 이걸 탁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완벽주의의 무덤에 살았다. 더더더 완벽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그러다 그것이 계속됐으면 강박증이 되었을까? 하지만 나는 맥이 풀리며 모두 포기해버리는 번아웃 증세가 수시로 찾아왔다. 결국 나르시시스트의 끝은 강박이나 번아웃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표는 타인의 평가로 달라져서는 안 된다. 나 스스로 만족해야 하며,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알고, 그로 인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 때, 비로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래야 타인의 질타에 내 입장을 올바르게 표현할 줄 알며, 타인의 실망감이나 어려움을 진심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야 진정 어린 사과를 할 수도 있고, 올바른 방안도 찾아서 제시할 수 있다. 타인의 문제 상황에서 공감이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방어적인 변명뿐이다.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각자는 각자 자기의 우주를 갖고 살아간다. 나에게 나만의 소우주가 있듯, 타인에게도 타인만의 소중한 소우주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우주에 침범해서 그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다. 타인의 평가는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우주에서 나 자신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족하니? 잘했니?'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무엇에 만족하는지 모를 수 있다. 그만큼 타인의 만족에만 기준을 두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 애쓴 것을 좋게 평가해 주지 않을 때 실망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타인을 만족시키려 애쓰지 말자. 나를 만족시키려 애쓰자. 나의 모든 행동은 나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타인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소중하다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에 만족하며, 내가 무엇에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싫어하는 것,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가 소중하다면,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게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내가 싫어하고 불편을 느끼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마땅하다. 타인의 평가가 좋게 하기 위해 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족이다.
그동안 아무도 당신을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신에게 주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당신이 그것을 스스로에게 해주면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감사하라.
그동안 타인 또는 당신이 당신 스스로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게 했다면, 이제부터는 그것을 당신이 스스로 거부하라. 이를 통해 당신의 자아가 보호받고 있음을 알게 하라.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자존감은 올라갈 것이다.
이제 타인의 판단이 기준인 세상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오직 나 자신의 기준이 중심인 당신의 소우주를 누려라.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