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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Nov 18. 2021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완벽주의의 늪

완벽주의는 무한의 루프이다. 왜냐하면 세상엔 완벽이 없기 때문이다. 끝없이 최고를 향해 달리지만, 그 결승선에 도착한 순간 다른 경쟁자가 있다. 뫼비우스의 띠다.



아버지는 나에게 혹독했다. 나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어리숙함, 미숙함, 실수, 잘못 등을 인정받지 못했고, 그 모든 것은 무능력이라 평가받았으며, 질타와 구박, 모욕, 핀잔, 타박, 체벌로 돌아왔다.


그 결과 나는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어린 시절의 아이다움을 빠르게 잃었고, 어려서부터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며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혹독한 평가가 나의 기본 능력을 꽤 괜찮게 만들어두었던 모양이다. 집에서는 무시당하고 타박만 당하던 내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자 칭찬을 받기 시작한 것. 덕분에 나는 여러모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웬만한 타박엔 기도 죽지 않는 집도 좋은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 나가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그곳에서의 삶은 행복했지만, 날개가 물에 젖은 나비처럼 축 쳐져서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그렇게 나는 가끔 무기력해지거나 번아웃되기 일수였다. 그땐 몰랐다. 그렇게 내가 병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병이었다. 완벽주의라는 늪의 병. 그 늪은 끊임없이 최고를 원하며 끝없이 질주하는 브레이크가 파손된 자동차였다. 그러다 폭주가 끝나고 나면 나는 번아웃되고는 했던 것이다. 나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간혹 학대자 부모나 완벽주의 부모 밑에 자란 자녀들이 이런 증세를 겪는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완벽을 요구했던 부모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끝없이 노력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나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나를 괴롭혔던 아버지를 그리도 미워했으면서, 나는 그런 아버지라도 그렇게도 인정받고 싶었구나.'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결국 증오하면서도 애정을 갈구하는,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끝없이 바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받을 수 없다. 지나간 과거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안에 남아 있는 상처 받은 미성숙한 자아는 아직도 슬픈 얼굴을 한 채로 그렇게 웅크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나에게, 말하기로 한다.


나는 나에게 말하기로 한다.


"괜찮아."


틀려도 된다고.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못 해도 괜찮다고. 실수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고. '다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서운 말도, 날카로운 말도, 손찌검도, 매서운 눈빛도.. 그 무엇도 너에게 날아오지 않아. 그러니 안심해.' 그렇게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나에게 허용을 해주었다. 틀려도 된다는 것을.


"진짜 틀려도 괜찮아?"


내 안의 어린아이가 묻는다. 진짜 틀려도 되냐고. 진짜 못해도 되냐고. '혼날까 봐 무서워.' 두려움에 떠는 아이는 누가 때릴까 봐 자꾸만 웅크린다.


"이젠 없어. 이젠 널 때리지 않아."


독립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너는 그 속에서 그렇게 아파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너는 그 속에서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들킬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도 꼭꼭 숨어 있었는지.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도 내가 실수하지 못하도록, 더더욱 잘하도록 만들려고 애썼는지. 그렇게 애쓸 수밖에 없었던 네가 너무 불쌍해. 네가 너무 안쓰러워. 너무 마음이 아파.


미안해. 더 일찍 알아주지 못해서.

내 마음의 상처는 그 누구도 대신 안아줄 수 없다. 내가 알아주고, 내가 안아주고, 내가 풀어줘야 비로소 그 아픔은 사라질 수 있다. 어린 시절엔 부모 등 보호자가, 그리고 커서는 내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서 보듬어주지 못했던 상처는 내 안에 꼭꼭 숨어서 아픔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나의 이상 행동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존재, 실수를 인정받지 못한 아픔. 잘할 것 만을 강요받았던 아픔이 미성숙한 자아로 아프게 남아 있었다. 더 빨리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지만, 이제라도 알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완벽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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