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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Jun 04. 2021

용서

용서할 수 없다

20대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오빠가 '마음수련 기치료'라는 곳에 다녀오더니 자신은 아빠를 다 용서했다며, 너도 아빠를 용서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부처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한마디로 열폭했다.


 "어떻게 그래?!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내 뼈에 하나하나 다 각인이 되어 있어서, 그 모든 기억들을 하나도 잊을 수 없어! 모두가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어떻게 잊어! 어떻게 용서해! 편해지기 위해서 용서하라고? 차라리 영원히 불편한 채로, 영원히 기억하고 살 거야! 내가 잊어버리면, 그럼 누가 그 아픔을 기억해주는데? 그렇게 아팠던 나는, 그럼 누가 기억해주는데?!"


오빠는 나에게 있어서 배신자였다. 같은 아픔을 나누고서도, 혼자서 도망가버린 배신자. 그래서 미웠다. 하지만 오빠의 선택을 말릴 자격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도 자가 뭔데 나에게 잊어라 말아라 말하느냔 말이다. 내 아픔과 고통은 나의 것인데.

용서는 누군가의 권유로, 누군가가 부러워서,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 안의 미움은 나를 고통의 늪에 빠지게 했다. 나는 자주 우울해지곤 했으며, 자주 화가 나곤 했다. 렇게 아픈 채로 부모가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 내가 몰랐던 '화'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평온하지 못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힘들었다. 당시 나의 한 가지 소원은 오직 '평온'이었다. 내 마음이 잔잔한 호수 같기를. 파도치는 바다가 아니라,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바람에도 잔물결만 잔잔한 호수 같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였고, 이따금 태풍이 뒤엎어버리는 날도 있었다. 괴로웠다.


그때 내가 만난 마음 치유는 내게 용서를 하지 말라고 했다. 먼저 미워하라고 했다. 마음껏 미워하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마음껏 미워해본 적도 없었고, 이따금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고 자책도 자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움의 대상이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나는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대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나의 분노와 화를 찾아내고,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고)에게 화를 내고, 대상이 내게 한 잘못을 말하고, 내 아프고 상처 받은 마음을 나 스스로 위로해주었다.


계속 반복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반복적이고, 장기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기에, 또 생각나고, 또 기억나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아프고 또 아팠다.


글을 썼다. 아픔을 글로 썼고, 치유를 글로 썼다. 원망과 미움, 불합리와 억울함 등을 글에 담았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남은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점점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도 미웠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싶었고, 그렇게도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한다면 설명할 수 없다. 아버지가 변한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내가 그것을 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대가 미울 때 상대는 가해자다. 가해자는 나의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다. 피해자는 그 상처에 매인 채로 살아가게 된다. 치유받지 못한 영혼은 그 시간에 매인다. 상처 받은 사건 가운데 머물러 나아가지 못한 영혼은 그 사건, 그 시간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받은 큰 상처나 트라우마로 인해  내면 아이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사랑과 애정이 크다고 하여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아픔들이 치유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모든 아픔은 저마다 개인차가 있고, 그래서 아픔의 크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치유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다.


용서란, 가해자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매어두었던 그 상처에 대하여 자유를 주는 것이다.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나에게 큰 아픔을 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가해자를 더 이상 원망의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용서다.


이것은 피해자의 선택이다. 누구도 강요할 수도 권유할 수도 없다. 피해자 스스로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선택하는 것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또한 용서했다고 하여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피해자 내면의 상처를 떠나보내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나도 크나큰 아픔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잊어선 안 된다고, 나는 성장하는 내내 그렇게 반복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일기로 기록해놨다. 절대 잊지 않으려고. 복수심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반복적으로, 반복적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용서라니. 나를 지탱했던 모든 순간들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마음치유를 시작하면서도,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마음껏 미워해보려고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를 단죄할 수 없고, 벌할 수 없고, 비난할 수 없으니, 미워하기라도 마음껏 해봐야 이 아픔이 끝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털어내고 털어내고 나니, 내가 진짜로 원했던 '평온'에 대한 염원이 떠올랐다. 그 평온은 이 미움을 떨쳐내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 열쇠가 바로 용서라는 것을, 용서의 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깨닫게 되었다. 할 것이 용서밖에 남지 않았을 때 알게 된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하여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이 원망과 미움을 계속 갖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용서하고 새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려웠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삶을 이어왔는데, 미움 없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지만 이 미움의 상태로 평온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평온하고 싶다. 나를 위해서, 나와 내 아이, 내 가족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래, 나의 행복을 위해서, 미움을 버리고, 용서를 선택하기로 나는 결정했다.




평범한 날이었다.


해가 반짝였고, 주변은 고요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용서, 그것은 마치 화학반응과 같았다. 내 평생을 미움과 원망을 안고 분노를 표출하며 살았는데, 이제 더 이상 분노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음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무거운 짐이 벗어던져지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 생에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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