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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May 24. 2021

아이의 놀이를 지켜볼 수 없는 엄마

아이와 놀이터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한다. 나는, 할 일이 떠오른다. 빨래 돌려둔 세탁기, 널브러진 옷가지들, 싱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 감들, 청소, 정리할 물건 등... 하지만 아이는 놀이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도 마음이 약해져 아이가 잠시 놀 수 있게 허락해준다. 아이는 신나서 놀기 시작하고, 나는 잠시 그늘에 앉아 쉬었다.


그늘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며 한 번 씩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살핀다. 그러다 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내 마음을 억누른다.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이니, 지금쯤 가서 할 일을 하고 밥 준비를 하면 될 것 같다.


아이에게 가서 집에 가자고 한다. 아이는 당연히도 싫다고 한다.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인상을 찌푸리고, '이 고집쟁이 꼬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한다. 어떤 때는 협박을, 어떤 때는 사탕을, 어떤 때는 꾸지람을, 어떤 때는 사정을 했다. 그렇게 나는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그렇게 놀고 싶은 놀이터를 저 뒤로 하고, 감옥 같은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가 어릴 때 이야기다. 나는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하는 엄마였다. 나는 당시 잘 놀아준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런 시늉만 했었다. 나는 아이가 노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해야 하는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늘 혼자 놀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나와 놀아준 적도 없거니와, 내가 노는 걸 지켜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도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시절인 지금, 아이가 놀이터에서 뛰노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이가 무엇을 해내는지 보아주고, 응원해주고, 지지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음에 감사하다. 렇게 변화를 이끌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킥보드를 타고, 자전거 타기를 성공하고, 그네 타기를 성공하고, 철봉에 매달리기를 성공한다. 줄넘기 뛰기가 잘 되지 않아 애먹고 좌절하며, 공을 뻥 차기도 하고, 휙 날리기도 하고, 잘 잡기도 하고, 놓치기도 한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부모와 함께 있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아이와 함께 있어줄 수 있다. 그 모든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음에 감사하다.


아이는 그저 부모가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부모는 위험할 때 보호하기 위해서 지켜봐야 하는 존재인 줄 알았다. 작은 것들을 성공시킬 때마다, 작은 것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부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와 놀이터 나가는 것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시간 낭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다. 아이가 없을 때 미리 치워놨어야 옳다. 아이 하원 시간에 돌아오는 길에 당연히 놀이터에 들를 것을 나는 예상했어야 옳다. 내가 게으름 피워놓고, 아이 탓을 하는 내가 어른답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가둔 것이다.


남자아이니까 에너지가 많다. 발산해야 하는 아이를 집 안에서만 키우니 문제가 생긴다. 밖으로 밖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공놀이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캐치볼도 하고, 곤충 채집도 하고, 하루는 네 잎 클로버를 수십 개를 찾았다. 자전거를 처음 태울 때는 목청껏 응원하고, 열심히 달렸다. 손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며 함께 기뻐했다. 그렇게 진짜 함께 즐기는 엄마가 되어갔다.


"엄마, 이거 봐요!"


어느 날 아이가 그네에 앉아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늘 밀어달라고 떼쓰기만 하던 아이가 스스로 발을 굴러 그네를 탔다. 나는 깜짝 놀라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어떻게 한 거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는 으쓱하며 혼자 연습했다고 한다. 이제 자기도 혼자 탈 수 있어야 한다며. 그렇게 엄마로부터 한 발 멀어져 갔다.



아빠는 내게 물었다. 내가 너희한테 못해준 게 뭐냐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를 때린 게 잘못이고,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른 것, 함께 놀아주지 않은 것,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것 등 잘못한 것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 못해준 게 뭐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없는데 당당히 물어보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자전거를 탄 날, 줄넘기를 성공한 날, 그네를 혼자 타기 시작한 날, 달리기를 제법 잘 뛰어서 처음 1등을 한 날 등. 그런 사소한 기억을 하지 못한 것이 못해준 것이라고. 그것은 일부 엄마도 해당했다.


가난이 문제였을까. 가난해도 함께할 수 없는 마음이 문제였을까. 애정이 없는 부모는 운동회에 와서 술에 취했고,  손등에 찍힌 1등 도장에 관심도 없었다. 나는 그런 무관심 뒤에 시무룩해졌다. 런 것쯤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닫게 되었다. 나의 자존감은 늘 그렇게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서 잘 크기만을 바라는 것은 극도의 이기심이 아니고 무얼까. 옛날엔 다 그랬다고, 못 배워서 그렇다고 변명한다. 그래도 그 속에서 누구는 사랑과 애정으로 매질을 했고, 누구는 술에 취해 화풀이로 매질을 했다. 그리고 변명했다. 사랑이라고. 그 어디에 사랑이 있을까. 그 어디에서 사랑을 배울까. 나는 이해가 안 가는데, 자꾸만 이해하라고 하니 마음에 병이 오지 않고 배길까.


아이가 뛰어논다.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논다. 나는 아이가 왜 웃는지 안다. 무엇을 성공했는지 안다. 슬플 때는 왜 슬픈지, 실망할 때는 왜 실망했는지 안다. 그게 부모가 아닐까. 함께 감정을 공유하고 아이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 그런 과정 속에서 아이도 공감을 배우지 않을까. 그만큼 이 세상에 나아가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나와 같은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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