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adhd다. 그것을 7세 가을에 알았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 adhd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수많은 것들을, 'adhd니까 그럴 수 있구나'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어 힘들었고, 너무 힘들어서 울 것만 같은 것이 있었다.
'no 관심'
아이는 무던히도 호기심이 많았다. 마치 미어캣처럼, 후다닥후다닥. 어느새 저쪽으로, 어느새 이쪽으로. 전등불 켜고 끄듯이 관심을 쉽게 켜고 쉽게 껐다. 그중 자기의 흥미를 크게 끄는 것은 또한 매우 몰입했다. 말도 안 되는 집중력이다. 전혀 집중을 못하다가도, 엄청나게 집중을 해버리는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런데 내가 아이와 함께 할 때 힘든 것은, 언제나 같이 있지만 따로 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는 나, 너는 너의 세계에서. 각자 자신의 세상에서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를 들면 '목욕'이다. 나는 아이를 목욕시키는 게 제일 힘들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리니까 힘든 것은 너무 당연했다. 모든 아가들이 어려서는 씻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고, 머리 감기를 싫어할 수도 있고. 그런데 4세, 5세, 6세가 되도록... 나는 아이를 씻기는 것이 계속해서 너무 힘들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으레 다들 그렇게 힘든가 보다고. 첫아이가 4세일 때 둘째가 태어났고, 그렇게 나는 두 아이를 씻기고 나면 땀범벅이 되어 푹 절은 김칫거리가 되어 나오곤 했다.
그런데 매번 드는 생각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지? 왜 이렇게 어렵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7세 adhd 판정을 받은 이후의 어느 날에 나는 깨달았다. 아이가 '협조'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부모나 그렇겠지만, 자녀들이 있으면 아이들끼리 비교가 된다. 대놓고 비교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 대상이 동생이었다.
3살이 어린 동생은 첫아이가 7세일 적에 4세가 되었다. 둘째가 아가 때는 목욕을 너무 싫어해서 그렇게도 힘들게 하더니, 앉아서 놀 수 있게 되고부터는 목욕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목욕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그래서 두 녀석이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 나면 적당히 했을 때 씻겨서 내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첫째를 씻기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힘이 드는데, 둘째를 씻기는 것은 너무 쉬워서 힘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수건으로 닦아주고,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려주는 것 까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안일처럼, 그렇게 하나의 노동이었다. 물론 5세 이후로는 옷 입기 등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도록 두었는데, 그 스스로 하는 것조차 두 아이가 차이가 났다. 나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협조와 비협조'의 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협조'를 받는 것이, 모든 활동에 있어서 얼마나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지. 또한 '비협조'하는 활동은 체력 소모가 많고 짜증이 늘어난다는 것을. 두 아이를 보며 나는 깨닫게 되었다.
협조와 비협조의 차이
협조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협조랄 것도 없었다. 비협조가 너무나 극명해서 둘째가 협조한다고 표현한 것뿐이다. 둘째는 '다음'을 알았고, 첫째는 '다음'을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것의 차이였다.
이것이 힘든 점이 무엇이냐 하면, 비협조하는 아이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의도를 파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에 반해 협조적인 아이는 오늘 유독 목욕하기가 싫다고 떼를 썼어도 막상 씻기 시작하면 내 의도를 파악해서 협조적으로 굴었다.
비누 거품을 아이 몸에 바르는데, 내가 몸에 바르고 팔을 바르기 시작하자, 다음 팔을 내어준다. 엉덩이를 씻기면 엉덩이를 볼록 내밀었고, 다리를 씻기면 다리를 내밀고, 사타구니를 씻기면 다리를 벌려주었다. 무언가 척척 맞아떨어진다는 '연합'의 느낌.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동질감이었다.
그런데 비협조적인 아이를 씻기는 것은 매일 새로운 아이를 씻기는 것과 같다. 엄마만의 규칙이 있을 텐데, 아이는 그 어느 것도 예상하지 않고 목석같다. 나는 아이를 씻기며 방향을 내가 억지로 돌려야 했고, 다음 씻길 곳을 요구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는 내가 씻기든 말든 자기의 상상 놀이를 하고, 몸은 자기 몸이 아닌 양 내게 맡기고 있었다.
그 온도차를 깨닫는 순간 나는 서글퍼졌다. 엄마가 아무리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끙끙거리며 저를 위해 애쓰고 있어 봤자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 있는 이 아이의 행동이, 이기적이기까지 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아니 늘상 짜증이 나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쌓이던 스트레스는 짜증으로, 화로, 분노로 상승곡선을 타고 서서히 가열되었다. 그 짜증과 화는 그 순간에 터질 수도 있었고, 이후에 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아이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그런 상황으로 보냈고, 그런 모습이 무관심으로 보였으며, 그로 인해 전혀 배려받지 못한다고까지 느껴졌다.
"왜 나만 해?"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도통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멀뚱해졌다.
"왜 네가 목욕을 하는데, 왜 나만 하냐고."
"......?"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또 그 모습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엄마가 널 씻겨주잖아. 그러면 너는 팔도 내밀고 다리도 벌려줄 수 있잖아. 방향을 바꿔 줄 수도 있고, 머리를 들어줄 수도 있지. 그런데 왜 너는 너만의 상상놀이를 하고, 나는 너에게 매달려 끙끙거리고 있느냐고!"
아이가 겁먹은 얼굴을 했다.
"도와줄 수 있잖아. 다음을 예상할 수 있잖아. 머리를 말릴 때도 너는 네 놀이에 빠져서, 제대로 대주지 않아서 자꾸만 너를 잡아서 끌게 만들잖아. 옷을 입을 때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입지를 않아. 그 놀이는 대체 언제 끝나. 나는 언제 너랑 같이 씻을 수 있어? 너는 언제 나랑 같이 씻을 거야? 너 혼자 옷을 입을 수는 있어? 너는 이제 혼자 할 수 있는 때가 다 됐는데... 너는 왜 아직도 엄마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네가 생각해. 네가 판단해. 그리고 네가 결정해. 그럴 수 있잖아...."
하다 보니 푸념이 되고, 하다 보니 비난이 되고, 하다 보니 비교가 되는 말들이 원망을 담아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날 무척 큰 깨달음을 얻었고, 무척 큰 사실 하나를 알았다. 내가 아이를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 아이는 자신이 하는 고리타분한(또는 반복적인)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