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가족은 돌봄의 대상이다. 그것은 엄마가 말기암 환자라는 사실로 바뀌지 않았다. 진단 이후 한동안은 모두가 엄마를 위로하고 힘을 주겠다는 어설픔으로 애를 썼지만, 아픈 자신을 자각시키는 채찍일 뿐이었다. 환자가 되었어도 이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런 세세함은 부족했다.
엄마가 슬프면 안절부절못했고, 엄마가 아파하면 어쩔 줄 몰라했으며, 엄마가 웃으면 급 안심하는 너무나 투명한 유리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도 가족이라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족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정 속에 엄마가 만난 병원에서의 새로운 인연들은 '환우(患友)'라는 이름의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 있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다. 시설이 좋은 만큼 비싼 비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용이 조금 저렴하다 하여 시설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환자들 사이에 알려진 곳들로 조건에 맞는 곳으로 찾아가셨다.
그곳에서 마음이 맞는 분들과 인연을 맺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는 공감을 했고, 공감을 얻었다. 다른 질병이지만 같은 아픔을 가진 공동체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좋은 정보를 나눠주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요양 병원은 여러모로 엄마의 조건에 맞았다. 자녀들은 각자 타지에서 취직을 했고, 할머니는 요양원에 모셨다. 아빠의 식사를 챙기는 것이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식단이 매번 바뀔 필요가 없던 아빠는 찬만 있으면 밥 정도야 지어 드실 수 있었다.
엄마의 암은 심각한 축에 속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분도 있었다. 엄마는 그들과 아픔을 나누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에게 위로를 나누기도 했고, 희망을 주기도 했으며, 그들의 위로를 가없이 받기도 하셨다.
나는 멀리서 전화통화로 그런 엄마의 변화를 전해 들었다. 엄마는 처음에 비해 마음에 안정을 얻었고, 암을 삶의 일부처럼, 몸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계시는 것 같았다. 물론 항암 치료를 통해 무찌르려는 마음도 절실했다.
이미 의사가 선고했던 초기 2~3개월의 시한부는 훌쩍 지나 있었다. 그리고 표적치료가 비교적 반응이 좋았다. 엄마는 나이도 있고, 장기 여기저기로 암이 많이 전이된 상태라서 수술을 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했다. 개복수술은 그만큼의 체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후 회복과정에서 후유증이 따르는데, 이미 면역력이 낮은 엄마는 그런 과정을 견딜 수가 없어서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이해했다. 엄마에게 희망은 민간요법과 심적 치료, 그리고 항암치료였다.
여전히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받는 항암치료는 엄마를 예민 보스로 만들었지만, 이제는 적응한 가족들이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후면 퇴원을 할 것이고, 다시 요양병원에 입원해 안정을 취하면, 엄마는 괜찮아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곁을 지킬 수 없는 가족 대신, 요양 병원의 의료진과 환우들이 엄마의 곁을 지켜주며 위로와 힘을 더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요양병원은 보통 산을 끼고 있거나, 산 중턱에 지어진 곳을 선호하셨다. 그래서 틈틈이 운동삼아 산책을 다니셨고, 덕분에 산의 맑은 공기가 엄마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또 노래방 시설이 갖춰진 곳이 있었는데, 엄마는 가수 소리를 들었다며 신나서 재잘거리셨다. 그 목소리가 들떠있어, 나도 행복해졌다.
그런데 엄마가 가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셨나? 하지만 20대가 되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그렇게 노래방을 다녔어도, 엄마 노래를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요양병원에 가서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우리 엄마 진짜 가수 맞네~!"
베시시 띄운 미소가 엄마 얼굴에 활짝 피었다.
처음엔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는 것이 싫었다. 엄마가 너무 멀어지는 기분이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기분이라. 그런데 막상 잘 지내는 것을 보며 약간 서운하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나 보다. 하지만 가족이라도 제대로 보필해 드리지 못하니, 미안함이 못된 이기심을 눌렀다.
그리고 점차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다. 치료 과정 속에서 겪는 수많은 고통들을 말로 설명해야 하는 가족과, 말하지 않아도 아는 환우는 관계의 궤가 달랐다. 우리는 각자 서로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울 수 없는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며 말라가는 것 보다 낫지 않은가. 그런 가족의 아픔을 보면서 아무 도움도 못 준다는 고통보다 낫지 않은가.
물론 개중에는 이런 요양시설 생활을 싫어하는 분도 있다. 그 성격과 개인의 취향 문제다. 엄마에게는 다행히도 맞는 방향이었고, 게다가 암환자들의 연령이 엄마 나이와 맞았다. 그만큼 50대 암 발병률이 매우 높다는 거다. 그중에 한 명이 우리 엄마였고, 엄마는 그들과 동고동락하고 마음을 나누고 우정을 키웠으며, 그 병든 몸을 서로 기대어 서로에게 온기와 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암과 싸우는 대장정의 막은 이미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