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층의 암환자는 암의 진행 속도가 급격해서 요양 병원에 요양하러 오는 수가 적었던 것 같다. 아니면 빠르게 사회로 복귀한다던지.
30~40대는 사회에서 한창인 나이다. 또는 자녀가 아직 어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만큼 치료에 전념하기 힘든 나이다. 실제로 병원에서 항암치료 때 그런 젊은 부부를 본 적이 있다. 초등학생 아들 둘을 둔 부부는 아내의 항암 치료를 위해 남편이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 부부를 보며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은 자식들이 직장인이었으니, 보살펴야 할 자녀가 없다는 것이 안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70대 전후는 위험군이었다. 스트레스 관리에도 취약했고, 신체 능력도 암세포를 이기기에 힘든 나이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몸의 기능이 많이 저하된 상태에서 암까지 발병한 것이라면, 항암치료 자체가 수명을 깎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양 병원에 대다수는 50대 아줌마 그룹이었다. 발병률이 더 높은 것인지, 생존율이 더 높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몸이 너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아서, 암도 그 정도라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게 되는 것인지.
그녀들은 유쾌했고, 활기찼다. 눈 내린 산이라도 열심히 오르내리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먹는 것도 건강식으로 잘 챙겨 먹었고, 몸에 좋다는 것을 서로 구해다가 서로에게 먹여대느라 바빴다.
지난 세월 가족을 챙기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함께 동고동락하는 환우들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게 스트레스 관리도 잘해나가던 그들에게가장 큰 스트레스는 아마도 배우자의 배신이 아닐까 싶다.
인생을 바쳤고, 암을 얻었다. 치료하는 과정도 녹록지 않다. 그래도 희망을 꿈꾸며 애써본다. 그러나 어느 날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되는 순간의 절망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의 배우자가 그랬다더라'라는 소식은 병동 전체로 퍼져나가 찬물을 끼얹었다. 사회에서 남 일 말하듯 그렇게 가십이 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결코 남 일 같지 않은 사건. 남/녀를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가능성 있는 사건에 모두 숨을 죽인다.
그들에게 이런 소식은 진단 확정 선고 못지않게 충격이었으며, 병마와 싸워 이긴다 하여 돌아갈 가정이 온전치 못할 일이기에 희망을 놓게 된다. 이런 경우 악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결국 스트레스다. 그리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만큼 큰 충격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된 환우를 몇 번 겪었다. 그런 점을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힘이 되어줘야 할 가족이 오히려 비수를 꽂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남은 가족은 과연 행복할까?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문제, 심리적인 문제, 양심적인 문제가 문제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외롭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자신이 없으면 너무 외롭고, 정상적인 생활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우리 집도 '엄마'가 암환자가 되어 지속적으로 정기적으로 '부재중'이 되었으니, 가정의 모든 것이 마비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은 자녀들이 모두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
엄마 또래의 여성들이 남편 밥 챙겨줘야 해서 혼자 여행도 못 간다는 것을 보면 정말 답답했는데,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나는 그래서 생각했다. 남편이 나 없이 혼자서도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나의 관여와 관심을 빼야겠다고. 내가 다 해주려 하는 것은 나의 이기적인 완벽주의다. 차라리 남편이 못하는 것을 내가 보완할지언정,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해 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자녀가 어리지만 아들만 둘이다. 이 아이들도 엄마 없이 혼자서도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아이들은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잘 해내는 경우가 많다. 남자아이들은 스스로 잘하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해주는 편이 나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못 함'을 받아들이고 '기다림'에 조급하지 않는 태도다.
우리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남편이 주방을 벼락 맞은 것처럼 난리를 쳐도, 아이들이 물건을 엉망으로 망가트려도 그것이 나중을 위한 투자라고 하면 값지다. 그렇게 '훈련' 시켜볼 것을 권한다.
자기 자신의 부족이 외로움과 절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그것으로 인해 가족 중 누군가의 부재가 상처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타인의 작은 위로와 관심에 목마르지 않도록 말이다.
희망은 어느 장소 어느 곳에서든 피어날 수 있다. 그 과정은 내가 양지바른 땅을 일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두 내가 감당하려고 하지 말자. 그것이 나를 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