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병 아닌 병이 하나 있다. 대부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은 모르고 지나치지만 혼자 아는 이 병 때문에 나는 수시로 불편하거나 괴롭다.
혹여 이 고질병을 밖으로 꺼내 풀어놓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시원해지기라도 할까.
대부분의 기독교가 그러하듯 우리 교회에서는
한 주에 한 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이 신성한 시간에도 자꾸만 발동되는 고약한 직업병 탓에 나는 번번이 따로국밥이 되고 만다.
더구나 요즘처럼 줌으로 만나니 산만하여 더욱 그러하기도 하다
내 속병은 말꼬리 잡기이다. 언어란 원래 소통에 가장 큰 의미가 있으니 말이 통한다면 굳이 문제시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그런데 언어 특유의 성질이나 내포된 뜻에 걸려 그냥 넘어가지 못함을 어찌하랴. 저건 저리 말하면 안 되는데... 저 말은 앞뒤가 안 맞는데... 저건 뒷말을 열어둔 꼼수인데... 온통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제대로 기도에 뛰어들 수 없다.
기도 중에 가장 못 넘어가는 말은 ‘원願합니다.’
이다. 원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바라는 바이니 결심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람이란 어차피 이룰 수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절대 노력의 순도로 따지자면
100퍼센트가 아니다. 만약 꼭 지키겠다는 결심을 보이려면 ‘원한다’가 아니라 ‘하겠다’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당연히 이에 적용되다 보니 알량한 양심 탓에 기도를 내어놓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중에는 ‘하고 싶다’
라는 말을 들 수 있겠다. 하고 싶다.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하고 싶지만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어디에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하고 싶다’에 관해서 일침을 놓은 구절과 마주친 적이 있다.
<‘하고 싶다’는 일종의 허영, 삶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를 찢어야 알맹이가 나온다>
소설 데미안에서 맥이 통하는 구절을 얼핏 떠오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고, 남에게 베풀기 원하고,
잘 살고 싶고, 열심히 노력하고 싶고.... 이런 것은 누구나의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이런 류는 뒷문을 열어둔 노력 정도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 절름거리는 두 다리를 끌고도 끝까지 길을 가겠다는 준엄한 의지와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녹록지 않은 환경과 질병으로 우리는 눈을 뜨고도 앞이 뵈지 않는 길을 걷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결심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시국에 그저 희망사항 정도라면 손에 쥘 수 있는 결과는 몇 그램이나 될까. 말은 뱉는 순간 그 말의 제한을 받게 되는 법. 하고 싶다, 원한다를 ‘하겠다.’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스스로 지게 되는 책임감 때문에라도 자신을 기대치로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을는지.
다만 공약空約을 남발하는 정치인의 '하겠다'는
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