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바뀐 교회 모임의 형태가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 비대면 zum으로 집회를 가졌을 때는 이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 어색도 했는데 반복하다 보니 더러는 좋은 점도, 불편한 점도 반반인 듯 느껴진다.
연중행사의 하나인 성경 세미나도 곧 줌으로 열릴 예정이다. 예전엔 뜻이 있는 사람만 일정한 장소에 가서 참여했는데 이제는 온라인으로 강의하니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여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이유를 불문하고 참여 가능하게 된 것이 내겐 오히려 탈이 됐나 보다.
세미나 참여를 원한다면 신청을 하라는데 미적대다 스무날이 지났다. 더러는 그냥 켜놓고 부담 없이 들으면 된다는데 내겐 그게 선뜻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자리를 틀고 앉아서 듣고 쓰고 학습하듯 청강해야 하는 내 성격(?) 탓에 제한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미적대고 있었다.
시간에 묶인다는 건 또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그것도 열흘씩이나. 나이 탓인지 듣다가 곧잘 조는 건 또 어쩌라고? 온새미로 잘 들을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가까운 자매에게 이런 내 상태를 전했더니 왈, "자아가 강해서"라고 한다.
언뜻 듣기에는 나와 거리가 먼 듯 들렸지만 곧이어 수긍하고 말았다. 나답고 싶은 것. 굳이 내 기호에 맞다 안 맞다를 선별하면서 잘하고 싶다는 특심을 갖는 것. 하려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 또한 자아의 또 다른 겉치레가 아닌가. 이것 역시 좋은 뜻으로 포장된 또 다른 방면의 탐심일 뿐이다.
나이만큼 조금도 넉넉해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싶다. 다 같이 참여하는 일이니 그저 앞서 끄는 인도자가 나팔을 불면 따르면 될 일을. 그런데... 이런 일 끝에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는 여우를 발견했다.
드러낸 이유는 그럴싸한 핑계이고 내심 게으름 탓이라는 민낯을 보게 된 것이다. 학교 가기 싫으면 배가 아파지는 아이처럼, 잘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 자체가 싫고 귀찮을 뿐이라는 것을.
신앙의 길은 부지런하고 신실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또한 세상의 즐거움을 얼마간이라도 포기하며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란 크고 작음을 떠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앙의 길이 세상의 길보다 더 소중하다는 참 가치를 알 때만이 매 순간 손에서 세상을 놓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신청 끝날에야 세미나 참석을 접수했다.
서로 다른 힘이 양쪽으로 끌어당길 땐 긍정적인 측면으로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자아를 부인하는 것의 시작은 더불어 함께 가기를 기꺼이 허락하는 것. 이를 위하여 나를 비우는 것. 이 기저 위에 마침내 남을 위한 배려도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미적댄 스무날. 넉넉한 품을 가지는 길은 참으로 멀어 뵈기만 하여 먼 하늘 보며
숨 한 번 길게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