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를 더해가며 시간이 저녁을 채색하고 있다. 버릇처럼 참상 머리에 앉아 격자무늬 창을 한 겹 열어젖힌다. 서늘한 바람이 성큼 뛰어드는 너머로, 건너편 건물 정원수에 두른 뽀얀 불들이 홈질하듯 빛을 나른다. 아직인가... 먼데 사는 딸로부터 퇴근했다는 전화가 없다.
자시(子時). 귀가 신고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시곗바늘 끝에라도 찔린 듯 알알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겠다며 탄탄한 직장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에 뛰어들더니 이제 저녁은커녕 주말마저 잃어버렸다. 화룡점정을 찍듯 신의 한 수라도 두려는 것일까. 칼날 위에 춤추는 인생처럼 저녁이 없는 삶은 갈수록 치열하게만 보인다.
하루의 삶에서 저녁이 갖는 의미는 시간 그 이상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의 저녁은 낮의 연장선상일 뿐, 저녁다운 저녁의 통념이 무너진 지 오래인 듯싶다. 우리 시절의 저녁은 가난했지만 훈훈함과 낭만이 있었는데 말이지.
내 어린 시절의 저녁하면 동네 골목이 먼저 떠오른다. 놀만한 터가 따로 없던 시절, 방과 후면 아이들은 동네 구석구석을 점령하고 땅따먹기, 고무줄 뛰기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공깃돌 놀이 등으로 어스름이 짙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어른들에게는 당연 TV일 것이다. 흑백 TV였던 그 시절. 저녁시간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네사람을 한자리에 모여들게 하는 텔레비전은 ‘이심전심’이라는 말로 풀이해도 좋으리라.
때로는 흥분으로, 웃음으로, 눈물로. 마치 무성영화를 설명하는 변사처럼 오갔던 저마다의 격한 해설은 세상을 향해 문 닫은 시간 뒤에 나누는 가족 간의 오붓함이오, 이웃과의 소통의 장이 아니었을까.
청소년 시절의 저녁은 늘 향수(鄕愁)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지금과는 달리 중ㆍ 고등학교를 입시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숨 막히게 버티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아이들처럼 학습에만 매달리지는 않았으니까. 행운을 가져온다는 네 잎 클로버를 찾느라 교정 풀 섶을 헤매다 하굣길에 보았던 붉은 노을, 공부를 핑계 삼아 늦은 저녁까지 친구 집에 모여서 수다 떠는 재미, 어둑 하늘에 별이 총총할 때 배꼽마당에 모여서 주옥같은 가곡을 불렀던 라이브 콘서트, 어느 기억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낭만과 열정으로 뜨거웠던 이십 대 청년의 저녁은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과에서 해방된 저녁 공간은 소돔 성을 지키는 의인들의 집합소 같았다고나 할까. 일일찻집을 열어 대학 등록금 지원하기, 고아원 방문하기, 양로원 돌봄 행사 등, 작은 거사를 추진하는 모임으로 늘 분주했고 비록 반딧 불만한 크기라 할지라도 세상을 밝힐 자신감에 차있었다.
내게는 특별히,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할 기회가 많았다. 첫 계기는 신부님을 통해 알게 된 삼랑진 근처의 작은 섬, ‘새마을 루까원’과 연결되면서이다. 격리된 나환자들이 살고 있는 곳인데 당시 낡은 나룻배가 침몰하여 나환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배가 없어진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내가 다니는 성당 대학청년부를 중심으로 통선을 만들어 주기 위한 모금운동이 몇 달 동안 전개되었다. 서면에서 남포동까지 돌아다니며 찹쌀떡 팔기, 시화 그려 팔기, 각 단체를 찾아다니며 기부금 호소하기 등, 저녁마다 모이고 또 모였다.
진수식(進水式)이 있던 날, 그곳의 나환자들과 거리낌 없이 얼싸안고 울었던 감격은 지금도 뭉클하다. 이 일은 그 후, 부산에 있는 모든 성당의 청년회 전체가 나서는 장학 후원회로 확대되었다. 그중 가장 큰 행사는 십일월이면 정기 콘서트를 여는 일이었다.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녁마다 모였고, 티켓 판매를 위해 지치도록 발품을 팔았다. 그때 나는 몇 년에 걸쳐 무대 사회를 맡게 되었는데 덕분에 그 시절의 인기 연예인은 거의 다 섭렵하는 영광을 덤으로 얻었다. 지금은 해묵은 앨범 속에서 전설처럼 누워 있는 나의 젊은 날의 한 조각이 되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저녁은 운치도, 낭만도 없어 뵌다. 부당한 편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그러하다. 나를 찾는 학생 중에는 가끔 ‘죽고 싶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때가 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일곱 살 유치원 아이에게까지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충격이지 않은가. 그들은 늦은 저녁까지 그리고 주말까지도 학교와 학원으로 줄달음치며, 하고 싶은 건 하나도 할 수 없는 나날이 싫어서 죽고 싶다고 했다.
배부른 타령이라고 쉽사리 치부해서는 안 된다. 취미도, 우정도 그리고 가족애마저도 저녁과 함께 강제 압류된 현상. 획일화된 꿈을 꾸며 ‘부모 있는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련(優憐) 한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낭만이 사라진 젊은이들의 혼술, 혼밥 문화이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2,30대 재벌회사 대표님을 너무 흔하게 본 탓일까. 변곡점을 모르고 높아진 그들의 눈높이는 결국 차(車) 없는 연애와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신접살이를 거부해버렸다. 통계에 의하면 결혼 적령기의 46퍼센트는 결혼할 생각이 없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저녁을 반납하고 뛰어도 지갑이 채워지는 속도는 소비 욕망을 따라잡지 못하니 차라리 가정을 구성하는 부담보다 결혼이나 출산을 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은퇴기에 접한 노인층도 옛날만큼 편하지 않다.
잘 준비된 여생이라면 안식과 축복의 시기요, 원하기만 하면 갖가지 취미생활과 봉사활동이 널려 있는 세상이지만 문제는 자식에게 바닥까지 내어준 부모들이 노후 준비를 미처 할 틈이 없다는 데 있다.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자녀의 취업난까지 고스란히 떠안고 맨주먹, 맨몸으로 전쟁을 치르듯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노인 계층의 비극은 기막히다. 백세시대가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유는 노인층은 물론, 먼저 온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층까지 가난이 대물림된 공동의 늪지대에 함께 빠진 탓이리라.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지난 시절들. 그러나 지금은 높아진 국민소득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지 않다는 하소연으로 이 시대는 울울하다. 이 고질적 비극의 원인이 ‘저녁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에 사회는 귀를 열고 있는지 닫았는지...
정적을 울리며 기다리던 전화벨이 마침내 울렸다. 퇴근을 알리는 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낮게 울려 퍼진다.
애썼다, 어서 쉬렴.
뚝.
지루한 기다림에서 해방되는 순간, 다시금 시계를 본다.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끌어안고 밤이 맞도록 심쿵해진 내 모습에 식상해하며 겹창을 닫는다. 모든 세대의 저녁은 밤과 함께 이제야 스러지고 있는데, 창밖의 떨기나무 잎들은 새우잠을 잤는지 벌써부터 부스스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