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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읽고

by 김두선


죽음은 선물이다. 주어진 길을 다 마친 뒤,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자가 받는 백발의 영광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죽음 예찬론’이다. 죽음에 관한 한 일찍이 남다른 체험이 있었고, 그에 따른 죽음에 대한 나만의 포석을 세운 것이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특별히 책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보는 이야기처럼 호기심과 숙연함으로 나는 첫 장을 조심스레 열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죽음은 참으로 다양했다. 열 달의 예비과정이 동일하게 주어졌던 출생과는 달리, 때도 차례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갖가지 상황으로 찾아오는 죽음. 나의 ‘죽음 예찬론’처럼 천수天數를 다하고 죽음을 맞는 것은 어쩌면 특별한 행운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짠하게 한 것은 젊은이들의 죽음이다. 어떤 부모에게도 자식은 금 쪽 같이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의 죽음은 평생에 치유할 수 없는 울혈로 부모의 가슴에 남게 된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내 자식 같은 그들을 붙잡아 줄 수 있는 한 마디가 없을까…



이제는 못 참겠다고, 더는 못 살겠다고 생각한 한순간의 절박함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지는 것이 삶이다. 어릴 때 죽어도 손에 놓지 않았던 장난감이 성장한 다음에 돌아보면 별 것 아닌 것 되듯이, 지금 사방을 에워싼 고난도 이기고 버티면 옛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때가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남겨진 부모를 생각하면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고 싶다.

‘내가 해야 될 일이 번뜩이며 찾아올 그때가 있다. 끝까지 버텨야 그런 날이 온다’ 저자의 진한 경험에서 나온 이 격려의 한 마디도 전해주고 싶다.



날마다 죽음을 만지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장례지도사ㆍ유품 정리사.

이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고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직업도 아니다. 하지만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면서 작가는 이 일에 들어섰고, 자기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세상이 추구하는 기준에 중독되지 않고 직업에 대한 편견을 넘어섰다.



‘괴로움은 삶에 다달이 지불하는 월세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행복이 우리를 찾아온다. 당연하게 여겨서 모를 뿐이다.’

날마다 죽음을 만나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불만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서 감사의 각도로 시선을 바 수 있었고, 그랬기에 스스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그는 한다.



불행한 죽음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교집합을 찾지 못한 사랑이 주는 오차의 한계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사랑을 줄 때에도 받을 때에도 조금 더, 그리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참값이 되지 못한 이 오차의 한계는 무엇 때문일까?

나은 삶을 지향한다는 명분이지만 결국 멈출 줄 모르는 탐심이 빚어낸 삶의 ‘중독성’ 같은 것이 아닐까. 명문대에 중독되고, 에 중독되고, 명예에 중독되고, 체면에 중독되고…



모두들 경쟁하듯 중독되어 달리다 보니 서로 보듬고 돌아봐줄 따뜻한 여유인들 있으랴. 피폐해진 가슴이고 보니 민낯 벌거숭이어도 너니까 사랑한다는 순수한 마음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피붙이를, 반려자를, 주변 사람을 우리는 불쑥 찾아오는 죽음 앞에 내어줄 수 없다고 그때야 몸부림치는지 모른다. 조금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게 되니까.



특이한 점은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이와 긍정적인 삶을 살았던 이의 주변이 극한 대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전자가 떠난 장소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쓰레기 더미가 언제나 널려 있었다. 방을 가득 메운 술병, 수십 년간 쌓인 쓰레기, 눌어붙은 먼지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시한부 생명일지라도 미리 예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변이 꼼꼼히 정리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결벽증처럼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는 내 생활습관도 죽음이 항시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고교 2학년 때 그리고 3학년 때, 나는 친한 친구 한 명씩을 차례로 잃었다. 충격이었다. 부고를 듣고 찾아갔을 때, 먼저 떠난 친구의 책상 앞에는 시험공부를 준비하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계획표 속에 남겨진 그녀의 시간. 그 시간은 이미 ‘없는’ 시간이었다. 이후 나는 원하는 일을 최대한 그때그때 행하려고 노력했고, 흐트러진 뒷모습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음이 없는 오늘이니까 날마다 정리하며 살았다.



한 인간이 삶을 마감하고 떠난 뒤에 정말로 남게 되는 건 바로 떠난 사람의 빈자리에 채워진 그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서 언제나 밥을 대접했던 어느 시인 경비원의 죽음. 가진 것을 이웃에 모두 나눠주며 죽음을 예비하신 할머니… 그들의 훈훈한 사랑은 그래서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함께 했다.



랬다. 자식에게 짐 지우지 않으려고 끝까지 혼자 버티다 떠난 어느 아버지의 죽음. 그로 인해 자식이 받게 된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름다운 떠남이지 않았다.

장판 밑에 오만 원 권 지폐를 수북이 깔아 두고도 온 겨울을 떨며 지새우다 떠난 한 노인의 고독사. 그가 남긴 돈을 쓸어 담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진 자식들을 생각하면 돈을 남기는 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결국 떠난 사람의 빈자리에 오랫동안 아름다움으로 머무는 것은 낮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피워낸 희망, 그리고 사랑 뿐이다.



책을 덮으며 문득 되돌아본다.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걸어온 내 길에도 더 중요한 것을 놓친 자국이 선연하다. 중독된 삶은 버려야지. '백년도 못 살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어느 노래가사처럼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쥐고 갈 것도 아닌데 다만하며 살아야지, 조금 더.

그리고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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