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답이 뭐라는 거야?”
프랑스 어학 문제지를 풀던 딸이 불쑥 내뱉은 말이다. 해설지에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만 설명해 놓고 결론이 없단다. 말하자면 정답을 결정하는 것은 해설을 이해한 사람의 몫인 셈이다. 프랑스에서 치르는 시험 중에 유일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있는데 운전면허 시험이란다. 교통질서에 각자의 생각이 존중되었다가는 큰일 날 테니 말이다.
정해진 답이 없다면 어떨까. 하나의 결론에 집중하지 않고 과정이 존중되는 까닭에 생각의 다양성이 보장된다는 프랑스 교육문화가 흥미롭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정답 맞히기’에 급급한 나머지 모든 생각은 하나로 집중된다. 그만큼 오답에 대한 불안감도 강할 터. ‘창의력 제로’라는 불명예가 아킬레스건처럼 따라다니는 이유도 이런 교육 탓이 아니겠는가.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잊어지지 않는 기억 하나가 소환된다. 딸이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빗살로 채점된 시험문제 하나를 내보이며 내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운동회는 왜 하는가?
이에 대한 딸의 답은 ‘부모님께 잘 보이려고’였고 정답은 ‘몸을 튼튼히 하려고’였다. 운동회 연습 내내 대오를 향하여 선생님이 소리 지른 말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부모님께 보여 주겠니?”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어린 학생의 옹골찬 항의에도 선생님은 아무런 반응 없이 정답만을 고수했다. 그것만이 최선이었을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인정되는 답안. 그것이 존중받을 때 생각의 다양성과 창의력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과정이 무시되는 교육이란 정해진 답 찾기에만 급급하여 O, X에 대한 알러지 또한 클 수밖에 없다. 무조건 너는 틀리고 나만 옳은, 절충은 없고 다툼만 있는 완충지대의 부재. 흑백논리에 강하여 적이거나 아군이거나, 내 편이거나 네 편이거나...
혹시 작금의 우리 정치의 현주소도 바로 이런 교육이 산출한 참담한 현상은 아닌지. 정답만 답인 우리 교육문화에 혁신은 일어날 수 있을지. 부질없는 염려가 마음을 어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