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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경험

by 김두선

가을 산이 급히 뒤로 달아난다. 드문드문 마을 풍광도 빛의 속도로 뒷걸음친다. 너무 빨리 사라져 잔상마저 남겨질 틈이 없다. 목적지를 향해 헐떡이며 질주하는 기차는 성급하기도 하다. 앞만 보고 달렸던 내 젊은 날의 세월처럼.


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들이 물기 빠져나간 노인의 까칠한 살갗 같다. 노랗지도 붉지도 않은 것이 단풍이 들려면 확실히 들든가... 어정쩡한 건 언제나 결핍을 느끼게 한다. 열심히 산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어쭙잖은 자태로 이도 저도 아니게 살았다 싶은 내 삶의 빛깔도 저러랴 싶다.


나는 지금 주부 휴갓길을 떠나는 중이다. 정확히는 곧 프랑스로 다시 떠나는 딸을 보러 간다. 딸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물에 손을 안 넣고 지내니 나로선 주부 휴가이자 완전한 주부 해방 기간인 셈이다.


내 딸은 어정쩡한 나와는 다르다. 어그러지고 구겨진 데가 없이 모든 게 반듯하다. 언젠가부터는 나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서 이런저런 일에 간섭하거나 주의를 일삼기도 한다. 번번이 들키고 만 나의 허술함 탓이다. 이번에도 딸에게 줄 음식을 미리 만들어 보냈는데, 여지없이 허술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부치고 돌아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잡채 소만 넣어 보내고 잡채 면은 따로국밥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누가 날더러 야무지다고 했나. 나를 안다고 하는 이들은 내게 속거나 나를 모르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치밀하지 않아도, 허술해 보여도 별로 속상하지 않아서 좋다.


"나이 들면 다 그래."


어디에나 통하는 만능키 같은 한 마디이다. 사실 언제까지나 기억이 생생하고 빈틈없고 자로 재듯 한 치 오차 없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숨 막히겠는가.

점점 기억도 흐려지고 눈과 귀도 어두워지고 걸음도 느려지고 말도 어눌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삶이 멈춰져야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말이다. 세월 가도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큰일 날 일 아닌가. 나도 나를 못 믿으니 나를 믿지 마세요. 속상함도 도가 넘으면 이런 여유까지 생기는 법이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하차 시간에 맞춘 알람이 울어댄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우르르 내리는 승객을 따라 엉뚱한 곳에 내렸던 기억에 대한 경고음이다. 노년도 미리 살아본 적이 없으니 이런 경험 또한 낯설다. 그러니 나이 드는 것을 속상해 말자.


괜찮다. 이런 일도 처음이니까. 어차피 인생은 끝날 때까지 모험의 연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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