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곤지암 화담 숲을 다녀왔다. 故 LG 회장의 아호가 '화담 '인 것과, 이곳이 그가 평생을 바쳐 가꾼 숲이라는 것은 가보고서야 알았다. 화기애애 담소를 나누며 편한 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곳. 화담 숲 공간을 누비며 돌비에 새겨진 그의 정신에 감사를 보낸다.
<내가 죽은 뒤라도 '그 사람이 이 숲 하나만큼은 참 잘 만들었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화담 숲 구경을 위해 곤지암 리조트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첫 개장시간에 맞춰 일찌감치 나섰다.
세심한 배려녀인 딸의 기획에 따라 1번 승강장에서
2번 승강장까지는 가파른 코스라 모노레일을 택했다.
11월 중순이라 잎을 반쯤 털어낸 나무들이 앙상한 빈 가지를 꽤나 드러내고 섰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잘 볼 수 없는 우듬지가 눈 아래로 스쳐 지나간다. 떠나는 가을을 오래 간직하라고 최대한 느릿느릿 공간을 접는 마음을 읽는다. 점점 뒤로 멀어지는 풍광에 탄성이 터져 날 때마다 떡 벌어진 입안으로 가을이 삼켜지고 물감을 쏟아부은 듯한 단풍에 눈마저 호사스럽다. 올려다보는 것보다 내려다보는 것에 기분이 더욱 업 되는 까닭은 신분상승에 목을 매는 인간의 속성과도 같은 맥락일까.
3번 승강장에서 내려 걷는 길은 편편한 데크 길이어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어 좋다. 직진 없이 구부러지고 휘어진 길의 연속이다. 삶의 멋도 돌아가는 길에 있음을 깨닫는다. 빨리 말고 느리게. 쉬엄쉬엄.
소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나무들의 자태가 어느 한 그루도 기이하지 않은 게 없다. 선의 미학에 감탄하며, 이 나무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자산이 될까?
셈에 밝지도 못하면서 생뚱맞게 내뱉아 놓고 스스로 겸연쩍어 웃어넘기고 만다,
예술로 재탄생하기 위해 인고의 삶을 살아낸 소나무들. 쩍쩍 갈라진 두꺼운 수피가 지난한 세월을 드러낸다. 얼마나 많은 날을 묶이고 죄이며 제한받았을까.
길 따라 드문드문 세워진 팻말에 깨알같이 적힌 스토리도 재미나다. 할머니에게 쫓겨난 매실나무 이야기, 나무도 돌도 아닌 교화 목 이야기, 금실 좋다고 알려진 잉꼬 새가 사실은 수놈이 바람둥이라는 이야기 등... 하지만 화담 숲의 면적이 여의도 절반만 한 크기라는데 구석구석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오래 잘 쓰려면 아껴 써야 하는 시절 어디쯤에 내 나이가 통과 중이므로.
<번지 없는 주막>. 마지막 코스로 체력 보충을 위해 찜해 둔 맛집 상호가 재밌다. 그러기엔 질퍽함이 없는 대체로 정갈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메뉴 선택이 기막히다. 쌀쌀하고 출출한 시각에 먹는 파전과 찹쌀순대라니. 막걸리 한 잔의 운치는 운전하는 딸을 위해 의리상 거절했지만 그래도 아삭하고 고소한 파전과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순대 맛에 이번 여행의 방점도 맛집 탐방에 찍히고 만다.
돌아오는 길. 한 잔 술에 취하진 않아도 가을 정취에 취했나 보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가을 산은 우리 길.'기분 좋을 때 하는 버릇인 동요가 절로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