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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상상하다

'관계의 힘'을 읽고(레이먼드 조 지음)

by 김두선

가슴속에서 해묵은 초근이 우지끈 들솟는 소리가 난다. 화석처럼 굳어 있던 마음이 연이어 뒤섞이고 바뀌고 풀어지면서 나를 흔들어댄다. 젊은 날에 읽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나온 길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걸어오지 않았을까. 책장을 넘길수록 아쉬움이 커져갔다.


#닫힌 문


레이먼드 조가 지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관계의 힘’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고, 곁에 두고 다시 읽어야겠다 싶어 구입해서 한 번 더 읽었다. 사람의 영혼을 이처럼 단번에 개방시키는 힘 있는 책을 평생에 몇 권이나 읽었을까.


‘나무는 혼자 서 있어도 나무고 돌은 혼자 있어도 돌인데,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네.’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관계에서 찾아야 하네.’


이것은 책 전체를 통해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중점일 테다.

이 말을 곱씹으며 인간人間이란 두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글자의 구조가 또 하나의 의미를 내게 전달해 준다. 인人은 서로 기댄 형상에, 간間은 문門에다 하루를 나타내는 일日이 더해진 형태이니, 그대로 뜻을 풀어보자면 인간은 ‘문을 사이에 두고 날마다 서로 만나는 관계’라고 해도 좋겠다.


문은 열고 닫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사용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렸다. 책을 읽는 내내, 여는 기능보다는 닫는 기능에 충실했던 나의 문을 생각하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은 어디에서 처음 잃어버렸는지, 닫힌 문의 결과가 지금 무엇인지, 세월을 거슬러 되짚으며 머리카락 세듯 한 올 한 올 떠올려 보았다.


이 책의 구성은 신분상승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붙잡기 위하여 뛰어든 미션에서 인간관계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 주에 한 명씩 4주 동안 제시한 인물을 친구로 만드는 미션인데, 글로벌 완구업체 원드랜드의 창업자이자 개발자이며 최대주주인 조 이사와, 미션을 수행하는 인물인 기획 2팀장 신(우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신은 물신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인간 특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관계를 제로섬 게임처럼 오직 뺏거나 빼앗기는 경쟁관계라고 생각하는, 이유 없는 만남은 없으며 친절 뒤에는 반드시 술수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비즈니스 외에는 누구에게도 다가선 적이 없고 회식이나 동우회, 연극 모임 등 직장 밖에서까지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행위를 부정하는, 끝이 보이는 연애에다 마음과 물질을 쓰기 싫어서 이성교제를 거절하는, 사람 사이에 나누는 허다한 기념일들을 무시하여 오로지 기념일이란 부모 제삿날 하루뿐인’ 등의 묘사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별스레 특이하지도 지나쳐 보이지도 않으며 쉽게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것은 나와 겹치는 교집합의 값이 컸기 때문이리라.


#배신


살면서 한두 번 배신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작품 속에는 갖가지 배신들과 맞닥뜨리는 상황이 전개된다. 오랜 고향 친구에게 구원의 손길처럼 베풀어 주었던 취업의 배려를 경영권 박탈로 돌려받게 된 조 이사. 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두 숙부의 도움을 받게 되지만 그 명분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사업체를 송두리째 빼앗긴 신. 등반을 갔다가 낙하 사고를 당하지만 친구들에게 버려지는 배신감을 경험한 구 부사장. 직장 따돌림에 대한 오탁의 복수로 개발 프로그램 파일을 도난당한 동료들. 상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만 상대의 목적 앞에서 헌신짝처럼 버려진 홍보부장. 거기에 더하여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배신의 기억도 오버랩됐다. 결혼해서 내 힘으로 구입한 보금자리를 시댁 사업자금 담보로 보증선 결과, 미래를 박탈당하고 시댁과의 관계까지 절연된 암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므로.


배신은 이처럼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경험의 결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불신, 복수, 단절, 미움, 이기심, 무관심, 시기, 경쟁 등 한 길로 통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관계에 대한 선을 긋고 냉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벽을 쌓는 이기적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이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데 있다. 나 역시 여과 없이 생가지마저 쳐내고 외로움 속에 갇혀 살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몸에 난 상처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도 제때 치유가 필요하다. 물론 배신에 대한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과의 화해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해명이나 용서를 구함도 없이 그야말로 배신은 배반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처를 품고 세상과 단절한들 무슨 유익이 있을까.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걸 잃는 거야.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관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네. 상처를 주는 것도 인간이지만 상처를 치유해줄 유일한 약도 인간이라네.’

어느 한때 오기와 분을 품고 살았던 나의 날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똥을 밟으면 신발을 씻으면 된다.’

툭 던져진 한 마디에 생각이 확장되어 갔다. 밟은 것도 나이고 씻어내야 하는 것도 나인데, 남의 탓이나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신발을 씻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했다. 아니, 신발이 너무 더러우면 벗어던지고 맨발로라도 걸어야 했다. 멈추면 더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까. 주저앉는 것보다는 계속 가는 것이 발전적이니까. '먼저 관심하고, 먼저 다가가고, 공감하고, 칭찬하고, 먼저 웃어'주면서 관계의 끈을 놓지 않다 보면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성공적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지금의 나를 진심으로 웃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람을 상상하다


갈피갈피마다 마음을 녹이는 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란 무슨 일에서든지 보이는 현실을 보지 않고 그것 뒤에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편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조 이사의 성공 비결도 그러했다. 백 회장에게 자신의 경영권을 빼앗기다시피 넘겨주게 되었을 때 그는 배신감과 분노에 휘둘리지 않았고, 자신의 유익보다는 회사의 발전과 수백 명 직원들의 생계와 권익을 먼저 생각했다. 물론, 장래에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는 한 가지 약속을 내걸었지만 그는 불확실한 미래의 불신을 선택하기보다는 믿으니까 믿는 믿음을 단순히 선택했다.


‘인간을 좋아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네. 하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성공할 수 있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들의 계산법은 그래서 늘 이긴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등반할 때 앞서 가는 사람은 정상을 보고 걸어가지만 뒤에 가는 사람은 사람을 보고 간다.’ 북한산을 오를 때 부사장이 했던 이 말은 푸시킨의 말과 결을 같이한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맨 앞에 서서 가기를 거부하고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비해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걷는 것. 최고가 되는 정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사람을 먼저 추구하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가 된다면 날로 굳어가는 우리네 마음은, 혼술ㆍ혼밥이 만연한 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작품의 플롯이 절정에서 결말로 들어설 즈음 다급히 쫓아가던 심장이 툭, 멈추는 듯했다. 마음이 홧홧해졌다. ‘이제 낙관만 찍으면 간절히 원하던 그림이 탄생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전처럼 간절하지 않았다… 신은 위임장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눈처럼 뿌렸다.’ 확실한 출세의 기회를 손안에 쥐었음에도 변해버린 신우현의 태도와 결단을 만나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금속판에서 툭툭 튀어 오르는 활자들이 끊임없이 얼크러져 뛰어다녔다. 따뜻함, 믿음, 사랑, 관심, 동행, 연민… 해사解絲머리처럼 모든 것이 풀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를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내 가슴을 온기로 채워 주었다.


책을 덮는데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회한이 버무려진 넋두리를 딸에게 카톡으로 전했다.

조 이사와 같은 정신적 지주를 만났더라면, 조금 더 젊은 날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딸이 답해 왔다. ‘아직도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잖아. 그리고 오늘 읽지 않고 어제 읽은 책이라서 얼마나 더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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