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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by 김두선

도서관을 가다 보면 재미있는 문패가 걸린 집 앞을 매번 지나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부부가 사는 집'


내로라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구태어 문패에 내다건 이유는 무얼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의미한다는데 거꾸로 해석해야 하나? 대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한 번쯤 주인장을 만나보고픈 생각이 굴뚝같은데 꾹꾹 삼키며 눈도장만 찍는다. 혹시나 그 집 대문을 나서는 부부의 얼굴을 오늘은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을까 은근 기대하면서. 세상에 잘 어울리는 부부는 또 얼마나 있을까 반문하면서.



얼마 전 휴대폰이 고장 나서 딸이 새 휴대폰으로 바꾸어 주었다. 하는 사업이 고비여서 내심 받는 게 편치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마냥 좋을 수 없었고 적당한 구실을 찾아야 했다. 선물하는 기쁨을 뺏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이상을 돌려줄 수 있을까 하고.


며칠 뒤였다. 남편이 유명 브랜드 매장에 가서 숏 코트를 하나 장만해 주었다. 은퇴하면 기회가 잘 오지 않을 테니 직장에 다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사 주고 싶단다. 그저 기쁘게 받으면 되는 것.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것. 미안하다든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 느낌의 차이는 무엇일까.

젊어 한때는 사랑이었고 그래서 미움이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이제는 친숙한 벗이 된 사람. 그저 습관처럼 옆에 있기만 하면 편하고 좋은 사이가 된 건 많은 마디들을 함께 통과한 날들이 가져다준 선물일 테다.



'자식은 평생 AS'라고들 한다. 내겐 이 말이 무겁다. 남보다 일찍 능력을 털어버린 엄마라서. 남겨줄 게 없는 엄마라서 받는 손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느낌에 비하면 부부는 사랑도 미움도 수혜까지도 한 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다. 흥하던 망하던 그동안 감당한 책임이 어느 누구 한 사람의 탓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한가한 저녁 시간. TV를 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느긋이 화평을 누린다. 예전엔 이런 일상이 지겹도록 싫었는데, '지겹다'라고 쓰고 '평화롭다'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터득한 다음에 오게 된 만족이다.

이쯤 되면 우리 집 대문에는 '어울리는 부부가 사는 집'이라는 문패를 내걸어도 좋지 않을까.



아, 그 집의 문패가 말 그대로라면 어쩌면 그 부부는 벗이 되기에는 이른, 아직은 한창때의 나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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