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는 잊어버려라.'
이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주는 행위’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 원칙이 무너지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소위 ‘본전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드물지만 내게 있어 본전 생각은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유일했던 것 같다. 사람을 향해서는 물질이든 정이든 포기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원래 사람이란 나를 포함해서 다 불완전한 존재이니 쉽게 넘어설 수 있었고, 또 지향하는 바가 그러하니 주고는 잘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신앙에서 만큼은 이것의 적용이 어려웠는데, 이는 아마도 유한한 사람이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라고 기대했던 속내가 포도원의 여우처럼 숨어 있었던 탓이리라.
고등학교 관문이 입시제였던 시절, 매주 토요일이면 나는 방과 후에 곧장 교회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성전을 혼자 청소했고, 그다음엔 조용히 앉아서 얼마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랄 것도 없이 멍 때리기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문제는 지원한 고등학교 입시에 불합격되고 나서였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주변의 친구들은 다 합격했는데, 유독 나만 불합격이란 쓴맛을 보는 듯했다. 억울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긴 한 거야?’
공부할 시간을 할애해서 매주 성전을 청소한 대가가 가장 먼저 계산대에 올랐다. 처음부터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그리 되고 보니 결국 본전 생각이 난 게다. 하지만 이 마음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생각하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저 좋아서 한 일 아닌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더니 딴은 스스로 궁색하기도 했을 터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일은 ‘쓰레기통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하나님을 향한 두 번째 거역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살면서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깨달아 알게 되었지만...
내리는 비는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동일하게 내린다. 햇볕도 그렇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일만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나쁜 일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 아닐 테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니 사람의 마지막이 된 순간에라야 비로소 총 결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참담한 상황을 만날 때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행위에 따라 매번 상벌이 가해진다면 무엇보다 징계 때문에 멀쩡하게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또 몇이나 될라고!
心心見春草. 봄꽃도 보는 눈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비록 내 짧은 견해일 수 있겠지만 사람의 연수 동안 그 행위에 따라 즉각적인 응징이 없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시간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긍휼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얄팍한 본전 생각은 어린 시절로 족하다. 지난날, 공부할 시간을 할애하여 성전을 청소한 것과 같은, 다만 내가 선택한 일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행위가 보상받을 일인지 아닌지는 논할 것도 못 된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내가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했느냐이다.
‘내게 있어 삶은 그리스도이니’
사도 바울의 견고한 고백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