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津)
고 박완서 님의 <대범한 밥상>을 읽고
'좋은 작품은 항상 사는 것이 처절한 때 나왔다.’
한 권의 책 읽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나는 몇몇 유명작가들의 이 고백을 떠올린다. 일이란 한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테다. 지금 손에 쥔 이 책도 작가의 한을 풀어낸 절박함이 있었기에 늘 몇 템포 더딘 내게까지 읽힐 수 있는 차례가 온 건 아닐지.
좁은 나무벤치에 몸을 맞추며 조심스레 눕는다. 읽던 책 두 바닥을 펼쳐 하늘을 가리니 온갖 소리가 귀에 매달린다. 파도 소리, 새소리, 땀 씻는 소리, 시간 가는 소리... 시나브로 엉겨 붙는 솔바람이 머릿속을 휘젓고 잽싸게 빠져나가는데, 모습을 숨겨놓은 우렁각시처럼 경실의 목소리가 책갈피 속에서 말을 건넨다.
경실은 고 박완서 님의 중편소설 <대범한 밥상>에 나오는 중심인물이다.
<.... 한방에서 잠만 잤을까. 딴짓은 안 했을까?
잠만 잤어. 그렇지만 영감님이 딴짓을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았을 거야. 그 짓이라도 그 영감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말이야.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못 내주냐 못 내주길.>
<그따위 건(유서)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심을 못 버리는 사람이 쓰는 거 아닌가?.......(중략) 재산은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얻은 거고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거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건데, 죽으면서까지 뭣 하러 참견을 해.
이 세상 법이 어련히 처리를 잘해줄까 봐.... 너무 못나서 제 몫을 못 챙겨도 그게 이 세상에 있지, 어디로 가겠냐?>
경실의 막힘없는 말에 화들짝 놀란다. 돈과 섹스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자유롭지 못한 나여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고, 흥미진진한 화젯거리이며, 더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생사의 문제가 되기까지 한다. 억누를 수 없는 관능적 욕구로 하루아침에 명예가 추락하고, 돈의 결핍으로 관계의 원칙이 어그러지는 이 시대에 경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분명, 평범을 넘어선 대범이었다.
엄청난 일을 당하고 처음엔 눈물도 나지 않았다는 그녀. 엽기니, 인두겁을 썼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부당한 풍문 따위는 그저 하찮고 우스운 것으로 받아넘기는 그녀의 대범함이 놀랍기 만하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상처에서 흘린 진(津)은 몇 그램이나 될까.
대범함이 일상이 된 그녀에게 이것은 다시 평범이 된다.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실의 언어가, 그 마음이, 물매를 던져도 파문조차 일지 않을 것 같은 그 고요함이 오히려 정갈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원숙(元淑)은 몸속의 진액을 모두 뽑아 올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진하고 난 다음에 오는 삶의 결과물 같은 것일 테다.
몸을 던지며 산다는 것은 세상을 온 존재로 맞서서 살아가는 일이다. 진이 다 빠지도록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그토록 힘을 다해 본 적이 있기나 했을까...
진(津)의 한자 구조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루터 진으로 사용되는 이 글자의 구조는 삼수변(氵)과, 붓을 뜻하는 율(聿)이 합쳐진 것으로써, ‘나아가다’라는 뜻을 지녔다. 글자의 구조를 해체해서 풀이하면 그 옛날, 나루터에 물자가 들고날 때 관원이 나와서 일일이 붓으로 기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들어있다.
나루터 진(津)은 ‘끈끈한 물질’이라는 또 하나의 뜻도 가지고 있다. 진이 빠진다, 기진맥진한다, 이럴 때 사용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체액의 의미가 나루터의 의미와 같이 쓰이는 까닭은 왜일까. 유추해 보건대, 나루터란 이곳저곳에서 도달한 물자나 물길의 흐름이 원활하게 떠나 보내고 받는 곳이니, 체액도 막힘없이 잘 흐르고 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함께 사용된 것이 아닐까.
하루가 저물기 전에 풀어내야만 하는 화두처럼, 그녀가 쏟아낸 언어가 협소한 내 생각을 자꾸만 들쑤시고 솎아낸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엉키는 생각. 그녀의 밥상머리 이야기를 물리고 그만 일어서려는데 남은 햇살이 붙어 있는 맞은편 저녁노을에 내 마음이 초조히 걸려있다.
혈관이 막히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생각이 막히면 사는 게 고달파지는 법! 이 나이가 되었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 고질적 관념도 부디 막힘없이 배출되어 흐르기를 바람 한다. 내 몸에 남은 마지막 진액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소진하는 열정이 있다면 혹여 경실의 열린 품品을 닮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