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3
친정어머니는 내가 마흔둘 되던 해 세상을 떠나셨다. 남아선호 사상의 봉건적 사고에서 전혀 개화되지 못하신 분이었는데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뜨시자, 생전에 모은 집과 재산을 고스란히 두 아들에게 넘겨주시고 큰 아들네와 합가 했다. 하지만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서 남은 생은 거의 우리 집에서 보냈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거실에서 마른빨래를 함께 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머니는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비밀 하나를 누설해 버렸다. 투자가치가 있다며 그린벨트로 묶인 땅을 사두려는 막내아들을 위해, 비자금을 몽땅 털어 주었다는 푸념 섞인 하소연을 털어놓은 것이다.
무거운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버릇처럼 되뇌며 나를 무척이나 믿고 의지하셨는데 내게는 그동안 일말의 언급도 없었다. 더구나 그 비자금이 동생 내외로 넘어간 시점은 내가 결혼 이후 최대의 경제적 고통을 치러 내야 했던 절박한 시점이었다.
순간 가슴에 맺혔던 사건 하나가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둘째 녀석이 첫돌이 채 못 되었을 때인가? 분유 한 통을 구입할 돈이 부족해서 생우유를 사 먹인 게 탈이 되어 사흘씩이나 설사를 만난 일이다. 그 당시 아파트를 구입하고 연이어 학원 사업을 확장하게 된 나는 은행 대출금이며 사채로 빌린 돈 갚기에 숨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닌 나는 아쉬운 소리를 잘 못했고 결국 이런 사달까지 난 것이다.
하필 그 시점에 투기를 목적으로 묵혀 둘 땅에 아들의 뒷돈을 대어주다니! 이 모든 형편을 직접 지켜보고 계시면서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 체 눈 딱 감고 계셨음이다. 심장 중심부에서 시커먼 그을음을 내는 불덩어리가 이글거렸다. 그날 이후 내 행동에는 변화가 생겼다. 옷이며 장신구며 화장품이며, 어머니의 필요에 따라 철마다 알아서 먼저 챙기던 작은 효심도 멈췄다.
"에구, 사람 인심 변한다 해도, 네 인심 변하는 거 보니 세상인심 다 변했다."
어머니는 나를 면전에 두고 연거푸 두어 번 말씀하시더니 긴 한숨을 몰아쉬셨다. 나는 변명도, 따지지도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이유도 모른 채 둘째 딸의 냉대를 감내하셨고, 내 가슴에 뽑히지 않는 대못을 박으려는 듯 얼마지 않아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
왜 그랬을까. 노인네가 얼마나 고생하며 지켜낸 살림인데, 새파란 젊은것이 그 돈에 앙심을 품고 그리 핍박하다니... 꿈적도 하지 않던 내 이기심이 한순간에 '쩡!' 가슴에 징 박는 소리를 내며 갇혔던 양심을 붉게 쏟아내었다. 인종지말처럼 동안의 내 행동이 얼마나 한심하고 천박한 것이었는지는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매 순간 풀고 살아야지. 맺힌 체 영원히 결별하는 것은 남은 자에게 두고두고 못할 짓이었다.
세 번의 죽음은 내 속에 칩처럼 저장된 전형적인 A형의 아킬레스 근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자아나 관습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이 살고자 했고
삶과 죽음의 간극에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죽음이 약속된 일회적인 삶이라서 망설이지 않았다. '다음'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고, 셈 없이 사랑하려 했고, '그럴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이해의 관점에 서서 물처럼 유연하기를 애썼다.
깔끔치 못한 흔적은 남은 자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기 십상이다. 떠날 때 돌아올 것을 기약할 수 없는 까닭에 나는 며칠간의 서울 나들이를 위해 버릇처럼 모든 정리를 마쳤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도 꼼꼼히 일러두었다. 자, 오랜만의 일탈을 위해 떠나자.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으며 지켜온 내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