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가대교 위로 차를 올렸다. 입 평수가 자꾸만 넓어진다. 탄성으로 튀어 오르는 고무공처럼 마음마저 탱탱하다. 탈출 1박 2일.
바다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건만 연신 목을 비틀어 차창 밖 바다를 바라본다. 하긴 삼십 년 학원 경영에 국경일 정도만 챙기고 살았으니 내게 1박 2일이란 아직도 횡재인 듯하다.
세미나 행사 차 나선 길이었다. 숙소로 정한 펜션은 해금강이 있는 갈곶리. 나는 그곳까지 가는 도중,
볼만한 곳 몇 군데를 들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목이 도시의 그것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 대형 마트, 카페, 즐비한 음식점, 사거리 신호등...
세월이 가면 기울기 마련인 인생과는 달리 거제도는 해마다 젊어지고 있었나 보다.
오후 네 시쯤, 무려 예닐곱 시간에 걸친 거제탐방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다. 더위와 피로에 객실을 향하는 발걸음이 허방을 딛는 듯하다.
방으로 들어서자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 너머 서쪽
으로 설핏 기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수평선은 붉게 타는 해운을 떠받치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장엄하다. 그럼에도 밖으로 다시 나갈 생각을 접은 채, 나는 에어컨이 켜진 시원한 방에서 지는 해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행사를 마치고 끼를 발산한 2부는 한낮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밤을 달구었다. 지쳐서 쓰러져야 멈출 것만 같은 기세에 지레 눌려 나는 숙소로 슬그머니 먼저 돌아왔다.
아침노을만큼은 놓치지 않고 싶었다.
이튿날 새벽, 알람 소리에 눈은 떴지만 바깥은 아직 희붐했다. 옷을 챙겨 입고 어두컴컴한 산길을 향해 나섰다.
십오 분이면 우봉제 전망대에 이를 수 있다는 안내
판을 보고 가벼이 여겼지만 밤이슬에 축축이 젖은 땅이 미끄러워 키 큰 동백나무 둥치를 몇 번이나 붙잡곤 했다.
반쯤이나 올랐을까.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이 깊어졌다. ‘휘르르 휘르르’ 새 울음소리는 정적을 가르고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은 후드득 물방울을 내 머리 위로 털어낸다. 섬뜩했다. 되돌아가려는 마음과 계속 가보자는 마음이 겨끔내기로 씨름했
지만 아침노을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걸음을 자꾸만 앞으로 밀어냈다.
십오 분이 그렇게도 길었을까. 드디어 전망대가 보였다. 돋는 해를 마중하는 노을이 먼저 붉어지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해무가 짙게 깔린 산하를 둘러보았다. 발아래로 우듬지에서부터 촉촉이 적셔 내린 아침이슬이 나뭇잎을 물고 대롱대롱 버티고 있다. 전망대에 마련된 의자에 잠시 앉았
는데 앞서 온 이가 거제도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
더니 대뜸 고향이 어디냐고 내게 묻는다.
거제도에서 태어났어요, 그래 놓곤 생급스런 답변에 금방 움찔한다. 부산 토박이로 자란 내 입에서 뜬금없이 거제도를 논하다니 한순간 나를 이처럼 자극한 것은 무엇일까. 고향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원초적인 본능 같은 것일까. 아니면...
솔직히 나는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은 초록 잎만 보고도 무슨 나무인지를 금방 알며, 들꽃이나 약초 이름도 줄줄 꿰고 있다.
또, 소에게 꼴 먹이기, 도랑에서 미꾸라지 잡기,
참외 서리하기, 장작불 땐 아궁이에 고구마 구워
먹기 등, 지금의 주말농장처럼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범상의 이야기
로 쏟아내곤 한다. 그래서 고향다운 고향이 없는 내겐 무미건조한 성장기가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부산 토박이가 아니다. 내가 두세 살쯤이었을 때 부모님이 터전을 거제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니까.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친척들도 하나둘 이주했지만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명절이며 방학마다 거제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은 시골아이들에겐 동경의 대상
이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아이 하나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저녁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까지 문간방 사랑채에 가득 모여들었다.
우리는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그림자놀이나
귀신 이야기를 밤늦도록 하다가 엉켜 잠들었고 먼저 잠든 아이들의 팔뚝에다 불침을 놓는 장난질
도 했다. 재 너머 동네에서 놀다가, 늦은 밤 횃불을 지펴 든 아이들이랑 돌아오는 너덜겅에서 했던
내기 달리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골의 정취도 초등학교 오 학년이 끝이었다.
입시제였던 그 시절, 육 학년부터는 오직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으니까.
거제도를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이십 대, 어디론가 무작정 잘 떠나는 내 방랑벽 때문이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나는 연안부두로 가서 거제 가는 승선표를 끊었고 선상에서 편지를 쓰거나,
하염없이 갈라지는 물길을 보거나 했다. 성포에서 지석으로 가는 신작로를 따라 펼쳐진 해안에서 청둥오리를 보며 갯가에 종일 앉았다가 마지막 배로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또다시 얼마의 세월이 흘러갔을까. 나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둔 워킹 맘으로서의 바쁜 일정을 감당하느라 낭만의 섬, 거제도를 까마득히 잊었다. 그리고 지금, 양초로 그린 그림에 물감을 붓듯 하얘진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귀갓길에 올랐다. 다시 보아도 거제의 변신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새삼 궁금해진다. 고향의 기준은 뭘까. 나의 참 고향은 어디일까.
부모님과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자란 곳, 아니면 고향의 원형이 있는 곳...?
답을 얻지 못한 내 안에는 지금도 물음표가 동동 떠다니고 있다. (201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