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수와 솔로몬

by 김두선

성경을 읽다가 가끔 덜커덕 걸려서 도무지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없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원수란 안 보고 살면 그만

인데 구태여 만나서 사랑할 일은 또 무엇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을 나는 제2의 인생

이라고 일컫는 결혼을 하고도 한참 후에야 그 답을 찾았다.



내 남편은 술과 친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다. 지금에야 나이 탓에 조금 줄었지만 한창일 때

에는 정철의 장진주사를 읊으며 일주일에 네댓 번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서일까. 우수에 찬 눈매를 가진 센티한 모습은 차츰 사라지고 그의 눈자위는 신선도 떨어진 생선 눈 마냥 불그레한 날이 많았다.

날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 보니, 쉬는 날인들 내게 할애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자전거 하이킹을 좋아했던 내가 그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를라 치면, 그는 과음에 지친 몸을 콩벌레처럼 말아서 벽을 보며 돌아누워 자는 척했다. 이게 뭐야. 내가 꿈꾸던 가정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양극에서 잡아당겨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무줄처럼 우리는 서로를 맞추려 조금도 노력하지 않은 채 팽팽하게 지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가 직장에다 두 번째 사표를 던지고 왔다. 신혼 때도 사법고시에 도전해 보겠다고 그만두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술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그렇게 마시려면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더니 정말 그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휴화산처럼 잠자고 있던 사법고시에 대한 욕망이 또다시 분출했던 것이다.


공부가 시작됐고 두 아이와 경제적 책임은 내 몫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절박하지 않았다.

안 된다고 막고 나섰다가는 평생 원망할 테니까 스스로 지쳐 그만둘 때까지 무관심 하나로 일관하였으므로.



말하지 않아도 촉이라는 게 있다. 결국 이 앙금은 마흔둘, 사법고시를 완전히 포기한 다음에 폭발

하고 말았다. 진정한 응원이 아쉬웠던 남편은 틈만 나면 원망에 찬 어투로 나에게 쏴 붙였고, 나는 아이들만 자라면 그때는 끝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지냈다. 그즈음 휴대폰의 주소록에 나는 남편을 이렇게 명명했다.

‘웬수’

이런 내가 달라진 것은 교회생활을 함께 하는 어느 자매님 덕분이다. 어느 날, 나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그녀는 성경의 한 구절을 들며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풀어냈다. 그리고는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서 사랑하세요. 자녀의 근원인 남편을 미워하는 것은 곧 자녀를 손상시키는 일이랍니다."


그녀의 직언을 듣는 순간, 두통을 앓듯 머릿속이 흔들거렸다. 아!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더니 그 웬수가 내겐 남편이었구나. 멀리 있지도, 찾아갈 일도 없이 바로 내 곁에 있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성경 한 구절을 그렇게 체득하게 되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달라져야만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의도에 동화되는 의식의 변화였다. 무관심했던 내가 미안했다. 평생의 꿈을 안지도 못하고 내치지도 못한 채, 술과 벗했던 그의 긴 방황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변화는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밖에 나가도 남의 편, 집에 들어와도 남의 편처럼 굴던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무심함은 햇살에 걷히는 비구름처럼 서서히 물러갔고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을 즈음, 우리는 부창부수의 아름다운 화음을 이끌어냈다.



현재 그는 주택관리사인 아파트 소장의 직함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다. 큰 꿈을 가졌던 젊은 날을 생각하면 허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정년퇴직의 연령을 넘겼음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한다.



어깨에 힘주며 출근길에 나서는 그가 든든하다. 세대마다 사장님인 아파트의 특성상, 나날이 전쟁인 일터에서 매번 지혜롭게 대처하는 그가 멋지다. 돌아보면, 법대 출신 특유의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 있지만 산 것이 아니었던 토막 난 날들이 가슴 아리지만 지금의 그는 얼마나 낮아지고 겸손하고 지혜로운지!


내 휴대폰의 주소록에는 ‘웬수’ 대신 남편의 새 이름이 적혀 있다.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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