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로 만난 하루

이기대 해파랑길

by 김두선

아는 대로 죄다 길 이름을 붙여 보아도 부족하다.

고샅 길, 데크 길, 박석 깔린 길, 자갈길, 돌짝 길,

흙 길, 너덜겅, 오솔길, 낙엽 길, 멍석 깔린 길,

후룸라이드처럼 오르락내리락,

다섯 개의 구름다리와...

구비구비 다양한 길들을 통과한다.



앙증맞은 갖가지 들꽃들이 눈길을 호사케 하는

길 한쪽 풀섶과, 반대편으로는 기암절벽 아래 출렁대는 흰 파도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

'지질공원'이라는 이름처럼 각지게 떨어져 나가 앉은 바위들 또한 길 모양새만큼이나 각각이다.



오늘은 혼자서 이 길을 걸었다. 갈림길마다 팻말에 의지하며 걷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까마득한 오르막 계단 앞에 아연 질색하며 눈이 지레 겁부터 낸다.


'이렇게 긴 오르막 계단이 있었어...?'


햇빛에 번득이는 은빛 논슬립이 마치 땅과 하늘을 잇는 듯 눈부시기까지 하다.

행하는 이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오늘에

야 펼쳐진 천상(?)의 계단을 한눈에 보게 되었나 보다. 올려다볼수록 숨차고 힘겨 걸음을 옮기다, 차라리 한치 발아래만 보며 오르기로 했다.

훨씬 수월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오늘이 답답하고 힘겨울 때에는 '멀리'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라, 는 의미가 체험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 아닌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음을 탓하지 않고, 보기 흉한 가시에도 아름다운 장미가 핀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올라온 만큼이나 다시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길은 평생 움켜쥐고 산 것 같으나 갈 때도 빈 손인 우리네 삶을 닮았다.

걷고 또 걷고 길이 다할 때까지 걷는다. 끊임없이 생각이 부서지고 모이고 마침내 아무 생각도 없게 된다. 다만 걷기 위해 걷는 것. 이것이 내가 길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두 시간 반 남짓 걸렸을까. 오륙도가 눈 앞에 나타났다. 며칠은 바람이 드세더니 오늘따라 방향도 없이 부는 꽃샘바람에 유채 꽃무리의 흔들림이 어지럽다.


정신 줄을 놓지 말아야지. 길의 끝에도 바람이 잦아들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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