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나이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다. 내달린다. 나이만큼 세월이 달리는 게 아니라 나이만큼 걸음이 내달리려 애쓴다. 그 열기로 숲의 아침이 데워지고 패기에 감탄한 메아리가 야호, 반응한다. 숲은 오늘도 만년청춘의 터이다.
숲길로 들어서는 입구는 내겐 시간 여행을 떠나는 출구이다. 쭉쭉 곧게 뻗은 편백나무 숲이 어귀에서부터 비탈을 따라 울울하게 펼쳐진다.
궤적으로 다져진 길을 부러 피해 나무와 나무 사이로 지그재그 걸었다. 낙엽이 바스락 마른 소리를 낸다. 낭만을 즐겼던 나의 이십 대가 발자국마다 앞서 걸어가고 연이어 삼십 대와 사오십 대, 작금의 일들까지 머릿속은 우주 몇 바퀴를 돌며 몇 번이고 분답다가 사그라들다가 한다.
잃고 난 다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게 된 황령산 편백나무 숲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내 삶의 공간은 네모진 건물 안의 네모진 강의실이 전부였고,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네모진 도서관의 네모진 책상 앞에서 책과 함께 하루해를 보냈다. 하지만 ‘팬데믹’이니 ‘락다운’이니 하는 낯선 환경은 꿈쩍도 않던 나를 밖으로 이끌어냈다. 코로나 19가 아니었다면, 도서관에서 내몰리지 않았다면,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이 도시 속에 숲이 있는 행복을 하마터면 모르고 살 뻔하지 않았을까.
두 개의 개울과 다리를 건너고 약수터와 체력단련장이 있는 고샅길을 지난다. 점점 숨이 가빠온다. 힘이 겨울 때마다 나무둥치에 뻗대어도 보지만 가시처럼 파고드는 수피의 까칠한 촉감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것이 일말의 자기 방어라도 하는 것일까. 아직 남은 길이 먼듯하여 차라리 발치만 내려다보며 걷기로 작정한다. 훨씬 수월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오늘이 답답하고 버거울 때에는 ‘멀리’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터득되는 순간이다. 결국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 아닌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음을 탓하지 않고, 보기 흉한 가시에도 아름다운 장미가 핀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비탈진 산 중턱 작은 웅덩이 앞. 긴 나무의자에 잠시 기대어 앉았다. 등에 산 지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개울 앞에 있자니 낙원이 따로 없다 싶다. 오늘따라 바람이 드세다. 불긋한 낙엽이 비처럼 뿌려지고 상체만 흔들어대는 몸치처럼 나무들의 춤사위도 어지럽다.
눈을 감으니 온갖 소리가 귀에 매달린다. 푸다닥 허공에 걸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 빈 가지 사이로 바람 달아나는 소리, 흙 속으로 계절 숨어드는 소리.... 바람 부는 날도 나름 이렇게 좋은 거구나, 처음 안다. 아니 그보다 궂은날 뒤에 좋은 날을 보듯이,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대로 즐기며 넘어서는 넉넉함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쁜 건 곧 좋은 것이 되어 오기도 하니까. 우리 살아가는 것도 늘 그렇게 교차하니까.
종심從心이 가까워지면서 가끔은 나이 값의 무게에 짓눌리곤 한다. 이 압박을 해체하려는 방법으로 숲을 걷기 시작한 일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분노를 자극하는 사람이나 앞이 뵈지 않을 때 나는 습관처럼 숲으로 왔다. 나이 들면 움켜쥐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고 졸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나서서 참견한다.
그러면 깊은 숨을 고르고, 시비를 멈추고, 생각을 차단하고... 마침내 통 큰 마음을 가진 그 너른 품에 가만히 나를 내어주면 어느새 마음이 누긋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숲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다시 걷는다. 길섶에 꽃대를 길게 뽑아 올린 노란 털머위 꽃이 눈길을 끈다. 키 작은 들꽃들도 아직은 볕뉘를 받으며 드문드문 피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노력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만물의 으뜸인 사람도 결코 행하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편백나무 숲길이 끝날 즈음 너덜겅이 이어지고, 두어 번의 에움길을 지나 터닝 포인트인 바람고개에 오른다. 호흡 한번 크게 하고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고故 박완서 작가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서 범상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 되고, 걸을 수 있다는 기적은 다른 세상을 체험이나 하듯 생경스럽게 빛나 보인다.
눈부신 하늘 아래 잎을 다 털어버린 벚나무가 다시 외롭다. 지난 이른 봄날, 이곳 정자에서 처음 맞닥트린 벚나무이다. 그때 떨켜만 남겨둔 잎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도 앓는 듯 떨고 있었다. 시름없이 올려다보던 내 마음이 삭정이 끝에 걸려 꼼짝 못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좁쌀 만한 움이 돋고 있었다. 죽은 가지로만 여겼더니 생명이 있는 줄기에 붙어서 아무도 모르게 꼬물꼬물 애쓰고 있었던 게다. 그날, 삭정이처럼 지난한 내 삶에도 새순 하나 다시 틔워내고 싶은 욕구가 호기 차게 일어섰다. 그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가치의 기준을 바꾸고 낮게 엎드리면 다시금 길이 보였다. 재능을 나누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숲을 거닐고, 틈틈이 글을 쓰고.... 그리고 지금 나는 나이 드는 내가 좋다고 말하고 싶다.
올라온 만큼이나 다시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산길은 평생 움켜쥐고 산 것 같으나 갈 때는 빈 손인 우리네 삶을 닮았다. 생각이 부서지고 모이고 부서지고. 마침내 이울고 있는 내 영혼이 이곳에서 생명으로 채워져 돌아간다. 숲에는 생명을 데우는 힘이 있다. 흙은 씨앗을, 계곡은 생어 떼를, 나무는 햇살을 품어 생명을 데운다. 겨울을 건넨 봄날. 동면하던 것들이 깨어나고 죽은 가지에 새 순이 돋는 것도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이 고이 품어낸 까닭이다. 숲의 기운을 기꺼이 받아 마신 내 몸에도 내년 봄이면 튼실한 근육 하나 불끈 솟지 않을까.
언제나 끝은 새로운 시작을 몰고 오는 법. 삭정이처럼 느껴지던 내 삶에 다시금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