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이’는 날거리 중

김두선 | 부산시 수영구 <새수영 제268 호> (2019년 6월)

by 김두선

우야노, 진짜로 우짜지... 소리 없이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사르르 꽃눈이 녹아내린다. 정겨운 봄비 이건만 창밖을 내다보며 애를 태운다. 까치발을 하고 올려다보아도 손끝에서 돌돌 말린 보무라지처럼 몽쳐서 꽃망울은 얼마 전까지도 시치미를 뚝 떼고 달려 있었는데...


대엿새 전인가. 밤새 구름 꽃을 피워낸 벚꽃나무가 눈도장만 찍으면 마음을 훔쳐가는 마법을 온 마을길에 풀어놓았다. 이거 실화냐, 요샛말로 연신 감탄했다. 그런데 황홀한 봄 향에 취한 지 겨우 며칠. 저렇게 비에 스러지는 건 너무하잖아. 아, 기다림은 지루하고 꽃의 날은 짧으니 저인들 억울하지 않으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부산(釜山)하고도 ‘남천동’이다. 그 옛날 남천(南川)이 흘렀다 하여 ‘남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랫동네는 광안리 바다를, 윗동네는 금련산 자락을 물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마을인 셈이다.


#1

남천동 아랫동네로 처음 이사 오게 되었을 때, 나는 마을 한쪽에 갓밝이와 해거름에 빛나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천 세대 넘는 대단지 아파트가 높이 치솟아, 바다는 그 뒤에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었으므로.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어부와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어촌마을. 그래서인지 삼십여 년 전, 첫 시장 나들이에서 보았던 이곳의 생태는 특별했다. 천막 지붕이 띠를 이룬 틈 사이로 헤집고 들어온 햇살을 받으며 고무 통 속에서 펄떡이던 은빛 활어의 신선 함이라니!


떡 벌어진 등판에 비율이 맞지 않는 좁쌀눈의 광어. 희고 윤기 나는, 오동통하니 긴 몸매에 짜리 몽땅한 다리를 가진 한치. 이름도 우스운 뽈라구(볼락)...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서 어머님 손에 들려온 숨 죽은 횟감이나, 뽀얗게 각 뜬 살점만을 보아왔던 내겐 심해를 드려다 보는 것처럼 신선했다. 지금이야 전통시장을 개량해서 지난날의 ‘해변시장’은 흑백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의 풍경처럼 되었지만...


‘남치이’ 는 그래도 여전히 감성만점이다. 나는 아랫동네의 광안리 바다를 좋아한다. 안개 짙은 날, 맞댄 하늘이 우울한 마음을 꺼내 보이면 서슴없이 경계를 허물고 안아주는 바다의 넓은 품을 좋아한다. 작달비 쏟아지는 날, 시푸른 얼굴 뒤에 감추었던 황토색 속마음을 내보이는 바다의 그 솔직함을 좋아하고, 발바닥을 간질이며 밀물과 썰물 따라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의 감촉을 좋아한다.


꼬막 같은 등을 굽혀 갈매기 떼 섞여 노는 아이들 웃음 가득한 여름바다를 좋아하고, 사람들 사라진 가을 바다에서 긴 그림자를 밟으며 오래오래 걷는 것을 좋아한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느라 발끝이 시리도록 걷는 겨울 바다를 좋아하고, 햇살 아래 체온을 덥히며 어깨를 맞대고 걷는 봄 바다를 좋아한다. 아니, 아니 무엇보다, 되돌이표를 찍듯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바다의 그 인내심을 좋아하고 어제가 오늘인 듯, 오늘이 내일인 듯한 나날이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날거리 하는 그 낡지 않음을 좋아한다.


#2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윗동네이다. 집 앞으로는

‘인문학의 길’로 조성된 벚꽃나무 터널이 펼쳐져있고, 집 뒤꼍은 등산로로 이어지는 산길과 맞닿아 있어서 상큼한 산 공기는 울울했던 마음도 단번에 가시게 한다.


금련 산자락에 앉은 윗동네의 한갓진 길에서는 또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꽃들의 날거리이다. 더구나 화려하지 않아도 한눈에 띄는 들꽃은 얼마나 살갑고 애틋한 것인지. 이들은 결별해야 할 때가 와도 잎 많은 나무처럼 딱히 버릴 게 없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미미하고, 싸잡아 ‘야생화’라고 불러도 그 이름을 몰라준다 하여 억울해하는 법이 없다. 그저 지문 하나 찍을 만큼의 땅을 지키다가 어느 하루 홀가분히 지고 말면 그뿐. 저 혼자 피어 저 혼자 지는 우리네 인생의 결국과도 같다고나 할까.



언젠가 세찬 빗소리에 잠이 깬 새벽이었다. 전날 길섶에서 보았던 작고 앙증맞은 네이비(navy) 색 꽃 한 포기가 생각났다. 비는 억수로 오는데... 무리지은 동무도 없이... 하필이면 외따로... 결국 이른 아침, 등산로에 올랐다. 비 탓일까. 꽃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금 간격을 두고 짧은 나무 꼬챙이를 먼저 박았다. 땅이 질퍽해서 쉬이 들어갔다. 하지만 가느다란 끈으로 줄기와 버팀대를 함께 묶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묶으면 벗겨지고, 또 묶으면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옷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 만에야 작업을 끝냈다.

들꽃을 좋아하게 되고, 들꽃의 이름 익히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일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괭이밥, 제비꽃, 금낭화, 복수초, 개별꽃, 노루귀...



금련 산자락 꽃들의 날거리는 입춘이 무색한 봄 속의 겨울과 함께 시작된다. 올해도 찬바람이 몰아치던 삼월, 매화가 먼저 봄소식을 물고 오더니, 혼자 핀 매화를 위로하듯 뒤이어 목련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겨우내 깡말랐던 몸에 물오른 개나리도 질세라 거드름 피우며 봄볕 아래 노란 잎을 틔운다. 그러고 나면 차례가 없다. 어느 날은 제비꽃, 민들레가 피는가 하면 벚꽃이 피고, 또 어느 날은 진달래가 또 그다음엔 철쭉이, 영산홍이 순서도 없이 날마다 피워낸다. 곧 들장미도 필 것이다. 꽃 따라 우짖는 새들의 울음도 분분하다. 윗동네의 진미(眞味)는 금련 산자락에 피고 지는 야생화와 꽃나무들의 날거리에 있음이여!



‘안빈낙도 안분지족’이라 했는가. 남치이 동네에 묻혀 사는 풍류라니! 이만하면 옛 강호가도의 시성은 아니어도 나름 최고의 상춘(賞春)을 누리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비가 오고 있나, 겹창을 연다. 자동차 지붕 위에 물먹은 벚꽃 잎이 미끄러질까 봐 발발 떨며 붙었다. 비는 그쳤다. 만춘에 이끌려 다시 동네 한 바퀴에 나선다. 벚꽃 터널이 만든 하늘은 초록과 연분홍이 이미 반반이다.


괜찮아. 벚꽃은 엔딩이지만 ‘남치이’의 날거리는 계속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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