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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국 Feb 13. 2019

은퇴교사의 서머힐 다시 읽기

1. 교단 36년을 돌아보며

은퇴교사의 섬머힐 다시 읽기     


1. 써머힐 다시 읽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


 36년 전 2월, 아직은 매서운 겨울 추위가 언땅 위로 차가운 바람을 딩굴게 하는 때였지만 한 낮에는 보드라운 햇살이 언 땅의 겉흙을 매만지며 봄 기운을 전하고 있었다. 교문을 지나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 몸을 돌리니 넓은 운동장과 건물이 보인다. ‘이제, 정말 교사가 되는구나. 두 달 정도 교육학과에 다니는 후배에게 빌린 교육학 서적을 뒤적거리며 교단에 설 준비를 했지만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밀려든다. 아직 봄방학 기간 중이어서 황량한 운동장에는 봄을 재촉하는 햇살 아래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차가운 바람만 저들끼리 가고 있는 겨울을 아쉬워하면 뭉쳐 뛰어다니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운동장에 아이들이 넘쳐 나면서 학교는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24살의 미혼 청년은 1학년 14반 담임교사가 되었고, 과학교사로 아이들에게 과학 수업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에 내 마음 속에는, 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할 정형적인 인간상이 또아리를 틀고 우리반 아이들을 만나고 있었으며, 과학 수업에서는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고 있다면 시험에서 일정한 점수 이상을 획득해야 정상적으로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의식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면서 정형적인 인간상에 부합한 행동을 강요했었고, 시험을 치른 후에는 일정한 기준점수보다 못 받은 아이들에게 기준점수 미달에 상응하는 체벌을 가했다. 다음 해부터는 매를 던져 버리고 같은 이유로는 체벌을 하지 않았다.

 체벌을 중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와 같은 시기에 교단에 섰던 수학과 김명근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당시에 학교에는 처녀 총각 교사들이 많았고, 구수한 부산 사투리의 성격 좋은 김명근 선생님은 젊은 교사들의 모임의 중심에 있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교사들을 모아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나도 그 모임에 참여하여 함께 읽은 책과 그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교육‘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계층적 속성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서 나는 교사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본다. 수학과 김명근, 역사과 오성근, 도덕과 박희자, 체육과 박미자, 과학과 홍성현, 과학과 황원기. 모임이 계속되면서 들고 난 교사들이 있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억 속에 희미하다.


 공부모임에서 만난 여러 책 중에서 “서머힐”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거의 무한한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주면서 성장을 돕는 서머힐 학교의 이야기는 내가 해야 할 교육의 지향이었다. 그런 학교를 만들고 싶어서 같이 근무하는 교사들에게 “한 달에 천원씩 모아서 서머힐 학교를 만들어보자!”고 떠들었지만 현실감없는 초임 교사의 이야기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겨우 천원씩의 돈으로 서머힐 학교를 세울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거나, 나와 함께 서머힐 학교를 함께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거나, 서머힐 학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서머힐에 대한 나의 지향은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불쑥 다시 고개를 쳐들고 대안학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두려 하게 만들었기도 했고, 진보교육감 시대를 연 곽노현교육감이 서울형 혁신학교를 지정하고, 주말에 연수를 열어서 ‘혁신학교 아카데미‘에서 일본의 서머힐 학교라는 기타 학교를 보여주었을 때 여전히 나에게 유효했었다. 그렇지만, 교단에 선 첫 해에 서머힐을 딱 한 번 읽은 이후에 서머힐을 다시 읽은 일은 없었다.

 36년 교단생활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오면서 나의 뿌리가 되었던 서머힐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슬금슬금 올라왔다. 서머힐의 무엇이 나를 그렇게 오랜 동안 나를 지배하면서 나의 지향을 이끌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나를 지배했던 것들은 서머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교단 생활을 돌아보면서 나의 활동의 내면 어딘가에 작용하고 있을 서머힐이라는 바탕을 집요하게 끄집어 내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교단에서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그것을 다시 만나려 한다. 어쩌면 나를 지배한 것은 서머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6년이 지난 지금에 서머힐을 만나는 노력은 단순한 호기심 외에 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교단에서의 삶을 돌아보면서 토해낸 기억들이 누군가에는 쓸모 있는 개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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