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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국 Feb 13. 2019

서머힐의 장점

2. 겁이나 증오에 물들지 않고 건전하고 자유로운 어린이들

며칠 전 도서 '서머힐'을 대출하기 위해서 답십리도서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가 도서관 가까이에 이르러 발길을 돌렸다. 6개월 정도 말미를 잡아 '서머힐 다시 읽기'를 써 나갈 예정인데, 6개월동안 써머힐을 빌린다는게 말이 안 된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출기간이 보통은 15일 정도인데, 얼마나 자주 도서관에 와서 대출연장을 하거나 또는 대출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당시 내가 읽었던 배영사 출간 도서는 지금은 품절되어 구입할 수 없었고, 가장 최근에 발간된 도서를 주문하였다. 집에 있는 책장의 도서가 넘쳐, 책을 속아낼 때마다 '도서를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은퇴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보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은퇴 직전에  벌써 어긋나고 있다. 

'서머힐은 런던에서 150km  떨어진 서포크 백작 령(領)의 레이스턴 마을에 위치'

이 정보가 36년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아직 해외에 눈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때였다. 2006년 7월, 한달의 '전공과목 해외연수'로 런던에 위치한 '킹스컬리지 런던'에 있을 때에 서머힐을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2006년에는 이미 대안학교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런던에서 4주간의 시간을 보낼 때에 주말마다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그래서 한 번은 비가 많이 내리던 주말에 런던에 있는 습지를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당시 나의 관심은 생태학이었고, 대학원에서 생태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알량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들과 생태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은 그들의 방을 검열 받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을 대신해서 방청소를 해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체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무슨 옷을 입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을 당시 이 내용은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으리라. 학교에서 검열받지 않는 아이들, 간섭을 받지 않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에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 세워 '애국조회'를 하였다. 한 겨울에 땅이 꽁꽁얼어붙은 맹추위가 몰려오거나 비가 내려서 우산을 쓰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날이 아니면 '애국조회'는 항상 아이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교사들과 함께 아이들을 운동장에 벌세웠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행사는 일제 식민교육의 유산이었다. 일제는 매주 천황의 교육칙서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서 '애국조회'를 벌였다.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도 식민교육의 잔재는 남아서 한국의 교육을 좀슬게 하였다.) 매일 열리는 직원조회를 통해서 지시한 내용들은 '교무 수첩'이라 불리는 책자에 메모를 해야 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교무 수첩을 일정 기간마다 검열한다는 얘기가 들려 왔다. 교실에서 담임교사가 학급 아이들에게 '지시'하거나 전달한 내용은 '학급일지'라는 곳에 매일 작성되어야 했고, 담임교사는 학급일지에 매일 도장을 찍어야 했다.

1985년, 2학년 14반 담임이었을 때의 일이다. 2학기 기말고사도 끝난 다음이니, 12월쯤이리라. 아이들과 학급학예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예회에서 '연극'을 하자고 해서, 김미희가 희곡을 쓰고, 아이들이 희곡의 내용대로  역할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장대운 교장은 나를 불러 연극 대본을 가져오라고 했다. 대본을 읽은 후, 대본의 내용이 '가출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는 불량하니 연극을 중단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울고불고 했다. 연극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검열과 통제가 교육이라고 아이들과 교사를 옥죄고 있는 교육 현장에서 서머힐이 추구하는 자유는 스물네 살의 젊은 내게는 망망대해에서 바라보는 등대였으리라.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책상에 붙들어 앉힌 채, 대개는 별 소용도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 학교는 옳지 않다. 자기의 자식들이 항상 다소곳하게 비창조적인 채로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자식들의 성공의 척도를 돈으로만 따지는 그런 비 창조적인 부모들에게 서머힐은 옳지 않은 곳일 수 밖에 없다.'

당시에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교과에 대하여 별 소용도 없는 것을 가르치며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교과의 내용이 교과교육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문제 의식을 모교인 남강고등학교 교지의 원고로 보냈으며, 과학동아에 보낸 기사 원고를 통해서 문제의식의 일단이 드러냈다.(1986년 7월호(통권 제7호), 1986.7, 114-115 (2 pages)) 

 나는 내가 가르치는 과학교과에 대하여도 별다른 의심없이 '내가 배웠던 대로, 과학 지식을 외우게 하고, 사지선다형 시험 문제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교단에선 첫 해인 1983년에는 매를 들고 80점이라는 점수를 기준으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못미치는 점수에 해당하는 문항 수만큼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2학기 중간 고사에 이어진 나의 폭력은 당시 3학년 10반 반장이었던 이영규가 해 준 충고에 의해서 멈추었다. 그 때, 열 여섯의 어린 나이에 이영규는 "선생님, 말을 물가에 끌고갈 수는 있지만, 매를 때려서라도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라는 충고를 했고, 나는 매를 던져 버렸다.

 은퇴 직전의 몇 년동안은, 내가 가르친 내용이 아이들의 삶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서 아이들에게 들이대기는 했지만 내가 가르치는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관계를 형성하면서 친구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 내쫓겨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있거나, 피씨방이나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있는 현실은 여전히 참담하다. 차라리 36년 전에 교과서를 통해서 소용도 없는 지식들을 배워야 했던 아이들의 쉬는 시간은 지금보다 질적으로 훨씬 나았다고 생각한다. 점심 시간, 쉬는 시간에 교실과 복도를 놀이터로 말타기 놀이를 즐겼던 아이들은 지금처럼 폭력적이지 않았고, 왕따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열혈청년이었던 시기였기에 부모의 입장에서 서머힐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본문의 내용중에 자식들의 성공의 척도를 돈으로 따진다는 내용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이르고 보면, 부모가 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기대하는 것은 '돈'을 잘 벌어서 어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리라. 36년 전보다 훨씬 강고해진 자본 중심, 노동 소외의 현재의 상황에서 서머힐은 대다수 학부모와 언론에 의해서 비창조적인 학교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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