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린이에게 맞추는 학교
학교를 어린이에게 맞추어야지 어린이들을 학교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는 어린이가 장차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어떻게 배워야 한다는 것들을 어른들의 생각에서 출발하고 가르치고 강요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다.
발령받은 첫 해에 나는 이제 중학생이 된 우리 학급의 70명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인간상을 요구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손바닥 크기의 '논어'(삼중당 문고) 책을 들고 살았었다. 그리고, 교사로 발령을 받기 두어달 전에 읽었던 교육학 서적들에서, 특히 교육철학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진선미의 합일체인 인간의 모습을 교육을 통해서 도달해야할 인간의 모습으로 설정하였다. 논어와 데카르트는 규범적이고 질서가 갖추어진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 학급의 아이들에게 일년 내내 아이들에게 규범적인 생활을 요구했었다. 아이들은 나의 요구에 거스르지 않았고 잘 따랐다. 심지어는 교생 실습을 나온 대학생(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성실하게 교생실습을 했었다.)에게 조차 우리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과 같은 엄격함을 요구하기도 했다. 첫 해 일년 동안에 나는 우리반 아이들의 손바닥을 참으로 많이 때려주었다. 당시에는 체벌이 전혀 규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내가 중학생 때에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해왔듯이 나도 그렇게 했고,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그렇게 일년을 보내고 다음해가 되었을 때 나는 2학년 담임이 되었다. 나와 같은 2학년의 담임이 된, 발령을 같은 해에 받은 김명근 선생님은 나에게 "이창국 선생님이 담임을 했던 아이들은 어떻게 이창국 선생님 냄새가 납니까?"라고 하는 소리를 했다. 퇴근 후에 신림동 순대촌에서 순대와 소주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던 중에 김명근 선생님은 "교육은 벽돌을 찍어내듯 정형화된 사람을 찍어낸 것이 아니고 아이들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지원하여 아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 김명근 선생님의 말은 큰 울림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만나서 교육하는데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냈다.
서머힐을 읽고 나서 내가 여러 선생님들에게 서머힐 같은 학교를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에 나는 학교를 어린이에게 맞추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36년을 돌아보면 학교를 어린이에게 맞추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있었을까? 아주 최근, 시민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진보교육감들이 학생자치 활성화를 지원하고 나서야 겨우 조금씩 그러한 노력이 나타났다. 2015년부터 근무했던 태릉중학교에는 학생자치의 방향을 잘 이해하고 학생회 활동을 이끌었던 박민영 선생님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학교 교육과정 안에 학생들의 생각이 드러날 기회를 가졌다.(태릉중학교는 2014학년도에 서울특별시 학생자치 우수학교 수상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 마저도 학교장의 의지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학생들이 학생회를 통해서 결정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학교장에게 거부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학생회에서 여름방학 직전에 '한 여름밤의 콘서트'라는 행사를 기획하여 아이들의 끼를 발산하고, 한 학기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수업이 끝난 오후5시부터 오후10시까지 다섯 시간동안 작은 소축제를 통해서 한 학기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행사의 입장료 5백원 또는 1천원은 소녀상 건립 기금, 또는 세월호 유가족 활동 후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아이들은 '한 여름밤의 콘서트'라는 그들에 의해 기획되고 운영된 활동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해 온 교장이 그 활동을 오후8시까지 끝내도록 요구했고, 아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축소 운영되었다. 다른 한편, 학생회는 학급회의가 열리는 날에는 '태릉 뉴스'를 제작하여 학생회 활동을 보고하였고, 다음에 계획된 학생회 활동을 안내하였으며, 그날 열리는 학급회의 의제가 어떤 이유로 선정이 되었고, 학급회의를 통해서 무엇을 결정해야하는지를 안내하였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함께 참여한생활공동체협약을 맺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해 온 교장은 '태릉 뉴스'의 제작을 중단시켰다. 무슨 이유로 그 일을 중단해야 하는지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학생회를 이끌던 선생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학생자치활동에서도 이렇게 제한을 가하고 있는데, 학교 전반에서 아이들에게 맞추어진 학교란 상상하기도 어렵다.
헬레네 랑에 학교는 새로운 모습의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건축가와 학생, 교사들이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어 공간을 재구성하여 늘 필요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학교는 어린이, 교사에게 맞추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하여도 어린이들의 의견을 들어서 정할 때에 더욱 질 좋은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2018년 1월에 방문했던 스웨덴의 개미학교에서 본 세계사 시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업 주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준비한 5분가량의 영상을 제공하였다. 학생들은 영상을 본 후에 자신이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스스로 정하였다. 그리고 각자에게 제공된 테블릿 PC를 사용하여 자료를 검색하고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테블릿을 사용하여 자신이 보았던 영상을 자료실에 들어가서 다시 볼 수 있다. 각자 자기가 조사하여 알게 된 것들을 발표를 한다.(자료를 조사하고 발표를 준비하는 모습까지만 보았다. 이후에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는 보지 못했으며, 담당교사에게 수업의 흐름에 대하여 물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학교를 방문해서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35년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김명근 선생님의 조언대로 그렇게 아이들을 만나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아이들에게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았다. 달라진 변화에 대하여 아이들은 반발했다. 이전처럼 엄격하게 대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의 간섭을 최소화하였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자주 요구하였다.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를 강제하지 않은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었고, 어른들이 강요한 가치에 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담아서 비판하는 글을 만들어내었다. 그런 변화를 확인한 것은 1984년 11월쯤이었다. 나의 주장과 가치를 강요하지 않은 지 일년이 채 안되어서 변화가 느껴졌다. 거기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후에 나는 나의 가치와 주장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학교가 맞추는 교육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학교의 일개 교사였으며, 아이들의 본성이 선한 것을 안다고 해도 학교라는 틀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