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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국 Feb 13. 2019

서머힐의 생활

4. 일년 내내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는 학교

 서머힐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어린이들은 수업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그들이 원한다면 일년 내내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는 오직 교사를 위해 있을 뿐이다.

 수업 내용은 보통 어린이들의 연령에 따라 설정되지만 이따금 그들의 특별한 흥미에 따라 설정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교수법이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수업 자체가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생 모두에게 나눗셈을 잘 가르칠 수 잇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없나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눗셈 자체는 그것을 배우기 원하는 학생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눗셈을 배우고자 하는 어린이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배우고야 만다. 어떤 방법으로 배우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며, 학생은 원하는 때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에 대하여 나는 아주 큰 공감을 하였고, 이 공감은 이후 교직에 있던 내내 나를 지배하였다. 책을 읽을 당시에 서머힐과 같은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킨 중요한 울림의 하나였을 것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하여 아이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어울릴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아이들을 위로하거나 격려하여 스스로 공부하려고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공부하고 싶어 할 때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교사들의 시간표를 가지고 수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심신이 지쳐있는 많은 아이들을 볼 수 있다. 당시는 학교는 아이들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배려는 학교 안에 없었다. 요즘과 같은 교육복지 시스템, 상담사(교사)가 없었다. 물론, 지금 운영되고 있는 교육복지프로그램, 상담사 운용이 아이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품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게다가 그때 당시 나는 아직 미혼의 청년이어서 아이들이 겪는 가정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학교가 그들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서머힐과 같은 대안학교에 대한 간절함이 컸다.

 서머힐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한국의 학교는 아이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도 한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간 때문에 인지발달이 같은 학년의 아이들보다 늦었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 비례 관계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때부터는 비례 관계가 너무 쉬운 것이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아이들은 나중에 잘 이해할 수 있는 학습 내용을 그 당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반에 있던 어떤 학생은 중학교 3학년이 된 소감을 말할 때 “한 것도 없이 시간에 떠밀려서 벌써 3학년이 되었다.”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을 했다. 성적이 좋던 나쁘던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고, 본인의 의지와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같은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학습한다. 학습을 하지 않아서 뒤처지는 시간이 많아지면 따라갈 방도가 없다.

 아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하면서 성적에 절망하면서 자살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과학고등학교, 일반계고등학교, 실업계고등학교로 3단계였던 고등학교가 오늘날은 국제고등학교,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자율형공립고등학교, 마이스터고등학교, 특성화고등학교, 일반학교 등으로 다양하게 계층화 되어 고등학교의 서열화가 이루어져 있어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적에 대한 압박이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던 30여년 전보다 더 심한 상황이다. 학력이 중요하는 학부모들의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매년 수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갈수록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문장의 한 부분 ‘우리에게 새로운 교수법은 없다.’가 지금 눈에 들어온다. 최근 학교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혁신학교에서는 수업혁신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내가 근무했던 마지막 학교 태릉중학교에서도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수업 혁신의 근간으로 하여 노력을 했다. 혁신학교가 생기면서 나타난 다양한 수업 혁신의 핵심은 ‘토론이 있는 수업’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 하부르타 수업, 거꾸로 학습, 협동 학습, 덴마크의 아프터 스콜레 식의 대화 수업 등 다양한 수업의 기술이 등장했고 교사들은 수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 없이 기존에 공부하던 내용을 배우고 가르치는 수업 방법의 개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서머힐에서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배우려고 할 때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배우게 된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수업 기술은 만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릉중학교에서 ‘ㄷ자 교실’의 형태로 책상을 배치하고 쉽게 3~4명 모둠을 만들어서 모둠 대화를 통한 협력 학습을 했던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수업 기술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수업은 수업과 관련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서로 묻고 답을 찾아가려면 그들 사이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에 이 수업이 가진 장점을 살려 수업을 통해서 온전히 서로 배움이 이루어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길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 매우 유용한 수업 기술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전농중학교에 근무할 때  일본의 사토 마나부 교수가 제안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알게 되었다. 그 수업 기술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고, '수업이 변하면 학교가 변한다'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얼마후에 중단했다. 그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혁신학교인 태릉중학교에 근무할 때에 모든 교실에 적용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만나면서, 왜 내가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중단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수업 공개 과정에서 수업의 준비, 수업에서 아이들의 활동 관찰, 수업 후 수업연구 모임을 통해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기까지는 3년에 가까운 시행착오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배움의 공동체 수업은 최고의 수업기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태릉중학교를 떠날 때에 배움의 공동체 수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수업에 적용하던 교사들이 거의 모두 떠나게 된다는 점이 아쉽다. 학교장은 배움의 공동체 수업에 대하여 전혀 이해가 없고, 배움의 공동체 수업의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교사들을 귀하게 여겨 남기지 않고 쫓아내고 있으며, 태릉중학교에 남아 있는 교사들은 배움의 공동체 수업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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