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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국 Feb 15. 2019

생활의 목적

6.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학교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서머힐에서는 학생과 교사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어린이가 인정받는 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이 언제나 한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선생님에 대한 공경은 있을 수 없다. 선생은 학생과 똑같은 식사를 하며, 선생에게도 공동체의 규칙이 똑같이 적용된다. 선생들이 우선권을 갖게 되면 어린이들이 화를 낸다.

어린이의 생활목적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나, 어린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교육자들의 의견에 맞춰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끼어 들고 조종하는 것은 로봇의 세대를 초래하는 결과밖에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의지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악기 연주를 강요하거나 그 어떤 것을 배우라고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영국 교회의 착실한 신자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매일 아침 여덟 시 반 전철을 타고 도시에 와서, 답답한 책상머리나 가게의 카운터를 지키며 굽신거리는 하인을 필요로 하는 사회, 즉 겁에 질려 있는 조그마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다시 말해서 완전히 위축된 성공회 신자들의 어깨 위에 걸머지워져 있는 사회를 위해서라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함께 지킬 공동체 규칙이 있을까? 학생들이 지켜야할 규정만이 있을 뿐이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공경할 의무가 주어지며, 선생님들에게는 언제나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은 언제나 학생과 쉽게 구별된다.

 점심 식사 시간에 학생들은 그들의 식당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며 식사를 한다. 선생들의 식사 장소는 학생들의 장소와 구별된다. 가끔씩 수련활동을 지도하러 갔을 때에 학생들과 같은 줄에서 줄을 서서 먹을 때는 공평하다고 느낀다. 아이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공평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떤 수련원에서는 선생들에게 별도의 줄을 마련하여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차별이다.

 1984년 3월, 학부모총회를 앞두고 환경미화심사를 준비하느라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운동장 쪽에 있는 창문의 유리를 닦기 위해서 창문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맡고 있는 반의 아이들이 청소를 하는 동안, 창문 밖으로 나가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방송이 들려왔다. “4층 꼭대기에서 베란다에 나가 있는 학생, 안으로 들어가고, 당장 본관 중앙현관 앞으로 와!” 당시 학생지도부장 선생님이 누군가의 제보를 받아서 취한 조치였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한 모양이다. ‘빨리 가지 않으면 우리 반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지 모르겠군.’하는 마음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학생지도부장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셨군요, 그런 줄 모르고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한다. 반 아이들에게 겪은 일을 얘기했더니 아이들이 실망한다. 혼이라도 나고 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학부모총회를 앞두고 교실마다 게시판을 새로 구성하고, 유리창을 닦고, 교실과 복도 바닥의 오염을 제거하는 일을 학생들이 담당하면서 ‘환경미화심사’라는 이름으로 우수학급에 표창을 하였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지속되어 온 것일 것이다. 언제부터 인지는 기억이 되지 않지만, 담임교사로 학급 학생들을 지도할 때, 청소 시간에 나는 복도 청소를 했다. 아이들이 담당해야할 청소 구역이 교실, 특별실, 화장실 등으로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나도 나누어 분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청소하는 동안에 아이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교장과 교감은 담임교사에게 청소시간에 ‘임장 지도’를 하라고 한다. 청소시간에 교사들을 교실로 내모는 일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나름 교실에서 함께 청소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임대형민간투자사업(BTL: 건설(Build), 이전(Transfer), 임대(Lease))에 의해 재건축된 태릉중학교에서는 청소를 위해서 늘 2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복도, 화장실 청소를 아이들이 담당하는 일이 없으며, 특별실 청소를 따로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공부하는 교실만 깨끗이 관리하도록 하게 하였다. 학교는 항상 깨끗했으며,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청소 활동에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모든 학교에 2~3명의 노동자들을 배치한다면 학교는 훨씬 청결하게 관리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과 과목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니까 있다고 믿거나 믿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36년을 돌아보면서 학교에서 비중이 높게 가르쳤던 내용들이 삶에 같은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소용이 된 일을 거의 없었다. 90년대에 전교조에서 활동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후, 2017년에 다시 만난, 수학교사였던 윤만식 선생은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과목들의 배점과 삶에 필요한 정도에 관한 배점이 너무 차이가 나는 현재의 입시는 틀렸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마이클 애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교는 무엇이 “타당한 지식”으로서 사회에서 존중될 것인지, 무엇이 단순히 “대중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매커니즘이다. 무엇이 타당한 지식으로 여겨질 거신지를 대부분 규정하는 학교의 역할 가운데, 학교는 어떤 그룹에는 지위를 부여하고 어떤 그룹에는 사회적인 인정을  부여하지 핞거나 인정을 최소화하는 과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학교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분리된 ‘어떤 일방의 가치를 지향’하는 지식교육에 힘쓰면서 정작 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감각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의 사회운동가이고 교육자이었던 비노바 바베는 1940, 1950년대 인도의 교육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의 교육 체계에서 한 개인은 학교를 마치는 해의 마지막 날까지 자기 삶의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다가, 마지막 해가 지나고 그 다음 해의 첫날이 밝아오면 자기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에서 아무런 오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한국의 교육에서 이러한 관점은 그대로 유효하다. 아이들의 삶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의 삶이나 정치권력이 바라는 삶, 자본이 노동에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몇몇 혁신학교에서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삶에 필요한 공부를 열어가고 있다. 100% 과정 중심 평가를 통해서 ‘교육과정 재구성’이 온전히 삶에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 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한 삶을 위한 교육은 이제 겨우 떡잎을 틔운 정도이다. 그 싹이 잎이 되고, 줄기를 튼튼하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끊임없는 교사들의 각성과 노력, 과정중심 평가를 지지하는 행정적인 지원이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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