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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무 Sep 20. 2022

고다르가 죽었다.

살아있는 이가 죽음을 생각하다.

고다르의 사인은 ‘의료인의 조력을 받은 합법적 죽음’이다. 죽음에 합법은 있으나, 불법은 없다. 어떤 죽음이던 법으로 규정된 사안은 없기 때문이다.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은 법으로 지정되지 못한다. 용의자가 사망하면 사건이 성립되지 않고, 종결처리되기 때문이다. 즉, 법리적 검토의 여지가 없이 불헌이다. 그러므로 합법적 죽음의 반어가 존재하지 않으니, ‘합법적 죽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만약 존재해야 한다면 ‘불법적 죽음’이라는 단어가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법적 죽음이 오늘날에는 결국 사회적으로는 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 해당될 테다. 이건 죽임 당한 이에게 너무나 모욕적 언사다. 죽임을 당했는데 불법이라니,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기에 말이 안 된다. 반어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의료인의 조력을 받는 합법적 죽음’이란 ‘안락사’이다. 안락사.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선택한 죽음 혹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죽음이다. 예로부터 누군가로부터의 죽음은 살인으로 칭해졌기에, 스스로 선택할 때만 합법이라는 명예 속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는 환자가 선택한 안락사임에도, 조력한 의료인이 처벌받는다. 그래서 부유한 이들은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로 떠나는 호스피스 여행을 가기도 한다지. 합법적 죽음인 안락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끄럽다. 항간에는 사람의 목숨이란 숭고한 것이기에 결코 자의던, 타의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 또 다른 입장에서는 고통받으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노인, 약자, 병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 개인의 권리라고 말한다. 재미난 것은 안락사를 고려해본 적 없는 이들이 목숨의 숭고를 논하고, 누워 죽음을 앞둔 이들은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기에 그렇다. 두 의견 모두 주장의 일리는 있으나,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되는 말들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을 숭고니, 권리니 다투는 것은 꼴사납다. 고다르의 선택에 대해서도 말들이 이어지지만, 그가 선택한 죽음에 대해 누가 입을 열 수 있으리. 대신 살아줄 것도, 대신 죽을 것도 아니라면 입을 닫아야 한다.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더더욱이. 아무튼 고다르는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니체도 죽었다. 고다르도 죽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죽었다. 어떤 이에게는 사망이라 표현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작고라고 표현되었다. 어떤 이는 별세, 누군가는 횡사. 객사. 무고사. 죽음에는 이름이 있고, 죽음에도 격이 있다. 모두 같은 죽음인데, 이름을 붙여 격을 나눈다. 살아서도 나뉨으로 고통받던 이들은 죽어서도 고통받는다. 장례에도 이름이 붙는다. 국가장, 시민장, 마을장 그리고 삼일장. 요즘에는 이일장도 많아졌단다. 연고가 없는 이들은 국가 기관에서 무연고장을 치러주기도 한단다. 죽음에도 이름이 있고, 장례에도 이름이 있고. 심지어 장지에도 이름이 있다. 저기 어디 부촌에 있는 납골당은 프레스티지 어쩌고란다. 납골당이 아파트 브랜드와 다를 바가 없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납골당 내에서도 1층과 5층은 가격이 다르단다. 태어나 어디에 사는지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어디에 안치되었는지도 중요한갑다. 이따구로 죽음에 격을 나누는 거 싸그리 법으로 못하게 해야 한다. 만류는 태어나 죽기 마련,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죽는 이가 더 많은 세상에서 뭐 그리 대단한 죽음이라고 격을 나눌까. 모든 죽음은 당연하되 아쉬울 뿐이다.


근래 죽음이 잦았다. 모두 다른 이름으로 죽었다. 어떤 이는 자연사, 어떤 이는 살인, 고다르는 의료인의 조력을 받은 합법적 죽음. 같은 목숨인데 모두 다른 이름으로 죽는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죽게 될까. 무엇이 나의 사후를 기억하는 말이 될까.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 꽤나 가까이에 있다. 크고 작은 죽음이 우리 곁을 오고 간다. 우리는 오늘 살아남았음에 감사해야 할까. 죽음이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감사해야 할까. 정말 그게 감사의 제목일까. 나는 오늘 죽지 않고 살아 글을 쓴다. 언제 죽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의료인의 조력을 받을 수도 있는 세상에서. 죽어본 적 없는 이가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탄생이 우리 곁에서 기쁨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며, 죽음은 언제나 눈물로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어선 안된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모두 죽는다. 다만, 그 죽음 아직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다. ‘메멘토 모리’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네 죽음을 기억하라’ 이건 죽을 거니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말이다. ‘카르페디엠’과 연결된다. 당신을 죽을 것이다. 나도 죽을 것이다. 죽음에 격이 나뉘는 것이 너무 싫지만, 누군가는 격을 나누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죽음에는 이름이 붙을 것이고 그 이름 중 ‘의료인의 조력을 받은 합법적 죽음’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쩌면 ‘의료인의 조력을 받은 합법적 죽음’또한 선택 밖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인은 약물로 인한 사망에 이르는 것 이기에 그렇다. ‘의료인의 조력을 받은 합법적 죽음’ 또한 되돌릴 수 없는 불가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도 없고, 죽는 이는 죽음의 이름조차 선택하지 못한다. 아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니 우리는 죽음 앞에 냉정해야 한다. 이름이 다른 죽음이라도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어떤 죽음이던 숭고하거나, 비참해서는 안된다. 모든 만물은 태어나 죽기에, 모든 죽음은 같다.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모든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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