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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15. 2017

성수를 담은 디테일의 정수

오르에르

절약이 미덕인 시대가 있었다. 아나바다 운동 같은 캠페인이 활발히 일어났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의 준말인데, 받침 없이 입을 구르는 그 단어가 기분이 좋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아나바다 운동의 일환으로 바자회로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가져가서 다른 물건으로 바꾸기도 했고, 종이를 다시 쓰기 위해서 폐지를 양손 가득 학교에 가져가는 날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유행이 지나거나 사이즈가 바뀌어 다시 못 입는 옷을 가지고 가방이나 파우치를 만들기도 했다. 이미 쓸모가 다 한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다시 새 생명을 얻어 쓰임을 더하게 되었을 때, 괜히 돈을 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끼던 물건이면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그랬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소비를 장려하는 또 다른 시대가 온 가운데, 지금 바로 이 순간 가장 많이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동네가 있다. 예전엔 그럴 기미가 전혀 없더니, 이제와 건축을 아나바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엔 너무 유명해져서 따로 예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곳은 성수동이다.



성수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공장들이 카페가 되거나 식당으로 바뀌었다. 공장의 모습을 유지한 채 구멍이 숭숭 뚫린 벽을 그대로 놔두고, 오래된 가구를 어디선가 가져와서 앉으라고 내어둔 곳이 늘어갔다. 어디 가져다 놓아도 하자 투성이로 보일 공간인데도 사람들은 '성수동이니까'라면서 이러한 흐름의 공간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손가락으로는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공장들이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성수동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공장 리모델링은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최대한 그대로 남기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 원래 공장이었어. 근데 우리가 다르게 쓰고 있는 거야. 신기하지? 신기하지?"라고 힘껏 소리치는 공간이 많은 반면, 오르에르는 그렇게 열심히 뽐내지 않아도 은연중에 티가 나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감히 디테일의 힘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01 앞뒤가 다른 건물


새로 지어진 건물보다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로 들어섰을 때 공간이 재밌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차는 공간들과 마주친다. 아주 많은 건물들이 한꺼번에 지어지던 7, 80년대에는 주먹구구식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건물을 땅에 욱여넣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많은 경험도 없었고, 사례도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가장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이나 재미있는 공간들이 오래된 건물에는 심심찮게 남아 있다.



처음엔 그저 오래된 건물을 잘 고쳤다고 생각했다. 자그마치가 기획한 두 번째 카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일을 뜯어낸 거친 자국과 깔끔한 로고와 감각적인 홀로그램 시트지를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로 들어섰다. 한 바퀴 쓱 둘러봤을 때까지 오르에르가 두 건물을 사서 함께 쓰는 줄로만 알았다. 두 건물을 교묘하게 연결해서 하나처럼 보이게 한 줄 알고 혼자 감탄하며 손뼉 쳤다. 나중에 몇 번이고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며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알았다. 아, 앞뒤 얼굴이 다른 건물이었다.



도로와 면한 건물의 모습이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완벽한 상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계단실을 통해 건물의 뒤편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따라 뒷마당으로 들어오면 다른 건물로 넘어온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굴을 건너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처럼 마당을 가진 옛 주택으로 강제 소환되는 것.


오르에르로 탈바꿈되기 이전부터 이곳은 이렇게 앞뒤가 다르게 계획된 건물이었다. 1층엔 조그만 가죽 가게가 3개, 뒤쪽 마당에는 원룸이 세 가구 있었다. 2층은 또 구두 공장으로 쓰였다. 건물의 부분 부분을 다르게 쓰려다 보니, 내부뿐 아니라 건물의 앞뒤 외관도 함께 달라져 버렸다. '역시 상가는 네모나게 생겨야지!'라는 생각과 '아무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 작은 테라스와 마당 정도는 있어야지.'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어느 설계자 덕분에 오르에르는 비밀스러운 정원을 얻은 셈이다.




02 아래위가 다른 공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라곤 말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치밀하게 나누어지고 강렬한 대비가 있는 공간이다. 그에 비하면 오르에르는 조금 여성스럽고, 유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취향은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어떤 스타일이 되었든 정도 이상으로 잘해버리면, 개인의 취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감탄사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 잘했다!"라고.

 

오르에르에 들어가자 먼저 보이는 오래된 가구들이 눈에 띈다. 요새 많이 만들어지는 단순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가구 디자인과는 많이 다르다. 세월이 묻어나는 나무 가구들은 조금 더 따뜻하고 정겹고 편안하다. 오르에르 1층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 의자부터 그렇다.



교회 의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로서도 물론 기능하고 있지만, 공간을 어느 정도 분할하고 있는 역할도 한다. 천장으로 지나가는 보와 같은 위치에서 1층 공간을 둘로 나누어 사람들은 조금 더 아늑하게 그들만의 영역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어느새 오르에르가 성수동에서 손꼽히는 카페가 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기 때문에 사람들로 꽉 차 있던 공간이 밤이 되자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떠난 빈자리에서 오히려 이 공간에 대해 더 수월하게 관찰할 수 있다.



교회 의자를 비롯한 다양한 고재들로 채워진 공간에 클래식한 형태를 가진 조명, 예전에 많이 썼던 바닥인 일명 도끼다시, 그 위에 깔려 있는 카펫까지 합쳐져 오르에르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많은 성수동의 공장들이 거칠고 날것의 공장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에 비해 오르에르는 옛날에 존재했을 것만 같은 집의 느낌이 있다. 



곡선이 많은 옛 가구들과 바닥에서 보이는 복잡한 패턴들은 모두 천장에서 균형을 맞춰준다. 다양한 소재들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인데도 천장이 높고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되어 있어 과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한다. 조명도 펜던트 조명을 쓰는 곳을 제외하면 모두 간접 등을 제작해서 최대한 눈에 보이지 않도록 계획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많이 덜어내려 노력한 부분이다.



1층 진입부의 공간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뒤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더욱 적극적으로 분할된 공간들이 나타난다.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금 더 내밀한 오르에르만의 공간이 숨어 있다. 기존에 존재하던 벽들을 일부 살리고 패턴이 있는 벽지로 마감했다. 과감한 선택이다.



외부의 벽돌 타일과 마찬가지로 붉은 계열의 톤을 유지하고, 따뜻한 전구색의 조명을 달았다. 라운지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된 책상들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고 이제는 창틀마저도 나무로 제작되었다. 


비밀스러운 방들을 지나쳐 문 하나를 건너면 건물 뒤편의 정원으로 나갈 수 있다. 날씨가 좋은 오늘 같은 가을날, 많은 사람들은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다. 넓고 으리으리한 정원은 아니어도 요즘처럼 개인만의 정원을 갖기 힘든 아파트의 도심 속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양.



자그마치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식물을 활용한 공간 연출이 오르에르에서도 이어진다. 사람들의 동선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식물이 빛을 받아 공간에 패턴을 그려낸다. 그림자들이 벽에 닿아 그림처럼 걸린다. 



건물의 앞뒤 모습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 층 하나를 올라왔을 뿐인데도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했던 1층을 뒤로 하니 새빨간 2층의 공간이 나타났다. 외관에서 이어지는 붉은 색이 2층에서도 이어지고 있지만, 1층과는 달리 최대한 간결하게 마무리된 인테리어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오르에르가 아닌 줄 알 것이다. 카페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1층의 오래된 고재와 달리 이곳에서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테이블이 자리 잡았다. 최대 4명 정도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옛날 가구들 대신에 요새 카페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기다란 책상이 2층에 자리 잡았다. 1층에 이야기를 나누러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면, 2층은 조금 더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진 공간이다.



2층의 핵심은 한쪽 벽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위 스피커들이다. 1층은 공간을 나누어 아늑한 느낌을 추구했다면, 2층은 많은 사람들끼리 같은 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다. 그것은 때로는 음악이 되고, 강연이 되고, 모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2층으로 채 올라오지 않고 오르에르를 떠난다. 2층에도 자리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다른 느낌을 가진 2층에도 들러 구경해 보시기를.




03 디테일의 정수


'한 끗차이'라고 표현할 때, '한 끗'은 화투나 투전과 같은 노름판에서 점수를 나타내는 단위다. 한 끗 차이로 졌다고 생각하면 땅을 치고 싶을 정도로 억울하고, 한 끗 차이로 이겼다고 상상하면 조만간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처럼 기뻐진다. 승패를 가르고, 모든 것을 잃거나 얻게 하고, 감정을 이렇게 널뛰게 할 수 있을 만큼 한 끗은 중요하다. 그리고 건축에서도 한 끗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흔히 건축하는 사람들이 디테일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오르에르의 첫인상은 오르에르 건물 입면 위에 달린 깔끔한 황동 간판이었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얇은 간판은 벽에서부터 떨어져 평평하지만 입체감을 가지고 시공되었는데, 들어오면서 보았던 황동색의 잔상은 공간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계속 이어진다.



도끼다시의 사각형을 구분 짓던 얇은 황동 띠는 복도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무작위의 패턴을 가진 채 시공되어 있는데,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의 카페와 다르게 복도를 지나야 카페로 들어올 수 있는 진입 문이 있기 때문에 안내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공간에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처음부터 눈에 띄게 보았던 황동의 연장선들이었다. 이 부분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디테일이라 부르는데, 언제나 마지막까지 건축가들의 최대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사용 시에 필요하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마무리하려면 보기보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요소들. 바닥과 벽이 만나는 부분의 걸레받이라던지, 서로 다른 재료들이 부딪히는 곳에 넣어줘야 하는 재료 분리대라던지, 벽지가 끝나는 부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몰딩 등이 그것이다. 작은 부분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가면서 디자인의 큰 흐름을 잃지 않고 이어갔다. 기성 제품을 쓰지 않고 황동색으로 직접 제작해 버린 것. 그런 데에서 건축가들은 감탄하고 간다. 하나하나 만들어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문에 달리는 손잡이들도 모두 황동색을 가진 것으로 구해 달았다. 오르에르에서 냅킨을 받치고 있는 그릇도, 냅킨이 날아가지 않도록 무게를 더하고 있는 문진도 모두 같은 톤과 재료로 유지되었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시간을 들여 조금씩 맞춰간 것이다.



공간은 공간 자체로도 사람들에게 어떠한 감정을 전하지만, 때때로 정말로 어딘가에 써넣어야 하는 글자들이 있다. 말로 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이곳의 이름이라던지, 주소라던지, 경고문이라던지, 안내 표지판이라던지. 우리는 그것을 흔히 '사인(Sign)'이라고 부른다. 사인물 혹은 사이니지(Signage)라고도 한다.



오르에르 안에 들어가는 모든 사인들은 건물 정면에서 보이는 큰 간판과 같은 디자인 어휘를 가지고 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황동이 지속적으로 재료로 쓰였고 일관된 글꼴과 형태가 오르에르의 성격을 더한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건물을 고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건물을 어떻게 바꿀지 모니터 앞에서 도면만 치려고 드는 사람은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요소다. 



벽돌 타일을 실제로 뜯어보고 나서야 타일 안에 존재하던 진짜 벽돌들을 그대로 남겨놓기로 마음먹었을 테다. 외부 입면에서 내부 시멘트 벽돌들을 드러낸 것에 이어 계단실의 하부, 내부 천장과 이어지는 벽도 모두 시멘트 벽돌을 노출했다. 내부의 강한 패턴과 오래된 가구들과 만나 어떤 느낌을 자아낼지, 상상만으로 결정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모두 실제로 공사를 하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서로 다른 스타일의 것이 충돌하는 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것이 그렇다. 리사이클링(recycling)이라고도 부르고, 리제너레이션(regeneration)이라고도 한다. 건물을 다시 바꿔 쓰겠다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원래의 공간이 흥미롭지 않다면, 아무리 오래된 건물로 리모델링을 시도해봤자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에르처럼 리모델링을 기가 막히게 하고 싶다면, 시 하나를 추천해 줄 수 있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나태주


오래 보는 것이 정답이다. 공간이 눈 감아도 훤히 보이도록 익숙한 사람만이 가장 훌륭하게 다시 쓸 수 있을 테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 버리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계절이 지나가면 가지치기를 하듯 공간의 요소를 더하거나 빼면서 바꾼다면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르에르는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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