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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22. 2017

비워서 만든 공간

뮤지엄 산

00 흐트러뜨리고 비우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


생각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아져서 머리가 무거워질 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무한 고민의 굴레로 빠져버렸을 때,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감정의 그릇에서 넘쳐흐를 때. 그럴 때 나는 걷기로 한다. 보통 한강이 나에게는 가장 가깝고 걷기에 좋은 장소다. 하지만 크거나 작은 공원들도 모두 좋다. 집중하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발걸음을 하나하나 옮기는 동안, 잔뜩 있던 생각 조각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생각과 감정이 덜어지니 머릿속이 간결해진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면 엉킨 실타래, 아니 엉켜 있는 이어폰 줄을 깔끔하게 풀어낸 것 같은 마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散策)'이라는 단어는 더 적절할 수가 없다. 흩을 산(散)과 채찍 책(策). 채찍을 흩트려 놓는다는 뜻으로, 정해진 목표 없이 지팡이를 이리저리 짚듯 정처 없이 걷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산책은 애초부터 집중해서 무언가를 해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흐트러뜨리고 비우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산책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어디일까?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를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피트니스 안에 있는 러닝머신 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산책을 이루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그중 없어선 안 될 것은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서 사라지고 나타나는 풍경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일상을 바라보며 건축가는 의도하기로 한다. 이곳에서만큼은 사람들이 무거운 마음속 짐들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바란다. 건축가의 개인적인 소망은 공간의 전체적인 목표점이 된다. 목적 없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를 뚝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 뮤지엄 산의 이야기다.




01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


누군가는 솔직함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솔직함을 무기로 내세우며 내뱉는 말들로 인해 상처받은 경험은 우리 모두 하나 이상 가지고 있을 테니까. 솔직함에도 종류가 있어서, 어떤 솔직함인지가 중요하다. 남에 대해 솔직한 것 말고, 나에 대해서 솔직해야 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잘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힘들어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린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


건축가 중에서도 이렇게 솔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바로 옆 나라 출신이고, 건축 교육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활동을 하며 현재 진행형으로 건축의 역사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안도 타다오라고 한다.



안도 타다오는 여러 건축 재료 중에서도 그 민낯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재료를 골라 썼다. 노출 콘크리트가 대표적이다. 콘크리트는 안도 타다오 이전까지 구조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 내외부는 모두 다른 여러 재료들로 옷 입혀졌다. 옷은 여러 종류였다. 철판을 붙이기도 하고, 돌을 잘라와서 붙이기도 하였다. 내부엔 벽지를 붙이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콘크리트는 원래 건물에서 내보이고 싶은 부분은 아니었다. 콘크리트는 예를 들면 화장한 예쁜 피부가 아니라, 살과 근육 안에 숨어 있는 뼈대이기 때문이다. 노출 콘크리트는 말 그대로 그 뼈대를 노출하는 기법이다.


콘크리트가 아니라면 자연을 건축의 재료로써 편입시켜 사용했다. 물과 빛이 그것인데, 때때로 안도 타다오는 치밀하게 빛이 들어오는 범위를 예상하고 공간을 조율했고, 물이 사물을 반사하는 성질을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활용해 내었다. 뮤지엄 산에서도 물론 안도 타다오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건축 재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콘크리트, 물, 그리고 돌이다.



먼저 돌부터 보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부지에 들어서는 박물관이라면 안도 타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보다는 자연스럽게 쪼개어진 돌무더기가 주변 풍경과 더 어울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성벽을 쌓듯 정성스럽게 맞물린 석재들이 뮤지엄 산의 첫인상이다. 아니, 첫인상이자 끝 인상이다.



돌로 쌓인 벽은 내부로 들어와서도 계속하여 이어진다. 단 하나도 같은 모양 없이, 직접 사람이 쌓은 모양새다. 깨끗하게 마감된 노출 콘크리트 면과 비교되어 더욱더 도드라진다. 



돌이 뮤지엄 산의 끝인상이기도 하다고 표현한 것은 뮤지엄 산 동선의 끝에 있는 돌의 정원 때문이다. 돌의 정원은 마치 경주의 릉처럼 볼록 솟아오른 형태를 하여 동선을 유도하고 있는데, 돌의 정원을 가로질러야만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할 수 있다. 마치 뮤지엄 산의 외벽이 바닥에 그대로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재료의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돌은 무거운 재료이다. 게다가 그 숫자가 많다면,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보기만 해도 무겁게 잔뜩 쌓여 있는 돌의 박물관을 가볍게 띄워주는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물이다.



쌓여 있는 돌의 벽들을 가볍게 들어 올려 준다. 물이 가지고 있는 반사 성질 덕분이다. 



물의 반사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장치가 숨어 있다. 바로 얕게 깔려 있는 검은색 돌. 물은 검은색 그릇에 담겨 있을 때 더 선명하게 풍경을 담아 반사시키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날이 좋은 날이면 건물 내부에서도 물의 일렁임을 관찰할 수 있다. 햇빛이 수면에서 반사되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 멋진 패턴을 보여준다. 안도 타다오는 미술관을 거닐다 쉬는 잠시의 시간에 외부의 물결과 빛이 만나 보여주는 이 간접적인 풍경을 발견하라 의도한 것일까?



노출 콘크리트 장인의 실력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부분에서 빛난다. 사실 건축가에게는 멋진 풍경을 가지고 공간을 설계하는 것보다 이런 작은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신경 쓰는 것이 더 어렵다. 특히 콘크리트 같은 경우에는 재료의 특성상 한 번 타설 되고 난 이후에는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철저하게 계획된 도면과 시공사의 협조가 필요하다. 일단 굳은 이후에는 새롭게 구멍을 뚫거나 무언가를 집어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깔끔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손톱만 한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도면이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시공사가 실수 없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낼 때까지 몇 번이고 부수고 다시 시도했을 확률도 있다.



콘크리트의 거푸집* 때문에 나타나게 된 선들과 바닥의 타일 경계, 유리 창틀의 간격이 모두 일정하게 맞춰져 있다. 끊임없이 재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건물에 있어야 하는 조명, 콘센트, 소화전 등의 설비들이 모두 노출 콘크리트 안에 매입되어 있다. 모두 처음부터 계획되었다는 뜻인데, 솔직히 변태 같다. 노출 콘크리트의 오타쿠가 아닐 수 없다.


*액체 상태인 콘크리트가 굳어 고체 상태가 될 때까지 콘크리트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틀.




02 풍경을 빌려온다는 것


보통의 박물관을 떠올려 보자. 박물관으로 들어가 티켓을 구매하고, 바로 옆에 있는 전시장 1로 들어간다. 전시장 1을 모두 보고 나면 그 옆의 전시장 2로 이동한다. 이동은 모두 실내에서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동선이다.


안도 타다오는 사람들을 내부에서만 빙글빙글 돌리고 싶지 않았다. 워낙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니, 조금 멀어도 괜찮았다. 아이들에게는 맘껏 뛰어 돌아다닐 수 있는 공원을, 어른들에게는 오래간만에 산책다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매표소와 전시장을 각기 다른 건물로 쪼개어 나눔으로써 가능해졌다.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구매하면 매표소 건물을 나서서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매표소와 전시관 사이에는 여러 정원들이 있는데, 꽃의 정원에는 때로 꽃이 만발하기도 하고 자작나무 숲에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기도 한다.



자작나무 숲이 끝날 즈음에는 콘크리트 벽이 동선을 유도하고 있다. 쉽사리 박물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 더 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건축가의 배려다.



콘크리트 벽을 쭉 따라 걸으면 얕게 담겨 있는 수공간이 나오고 콘크리트 벽은 끝이 난다. 콘크리트 벽이 끝나는 지점부터 빼꼼 박물관의 전체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강렬히 붉은 조형물과 더불어 뒤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돌덩어리 건물이 바로 뮤지엄 산의 본모습이다.



물의 정원이라고 부를 만하다. 뮤지엄 산으로 진입하는 입구는 이곳 하나뿐이다. 다리처럼 쭉 뻗은 이 공간을 걸으면서 건물과 조형물처럼 사람들도 가볍게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무거운 재료와 반사 성질을 가진 재료가 만나 이뤄내는 풍경이다.



풍경을 빌려온다는 의미의 차경(借景)은 동양의 건축에서 창을 이용하여 바깥의 자연 풍경을 그대로 내부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림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창에 풍경을 담아 벽에 걸듯 즐기던 데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꼭 한옥이 아니어도 풍경을 빌려오는 건축적 기법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뮤지엄 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뮤지엄 산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자연 속에 폭 담긴 산책로를 조성한 것으로 모자라 벽을 사용해서 그 안에 또 다른 액자를 만들어 두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오는 벽과 바닥은 움직일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건물 내부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의 복도에는 언제나 창이 있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비대해지면 그만큼 창을 볼 수 없는 면적이 늘게 되는데, 복도는 모두 건물의 바깥쪽에 배치하여 언제나 바깥의 풍경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박물관의 동선 상으로 다음에 가야 할 돌의 정원이 보이는 창도 있고, 일부러 바닥에 낮게 설치하여 바람에 따라 물결이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창도 있다. 창에 풍경을 담는 전통적 의미의 차경 말고도 안도 타다오의 특기는 바로 다음이다.



뮤지엄 산의 카페테리아가 있는 곳이다. 뮤지엄 산의 갤러리들을 보고 난 뒤 사이사이에 언제라도 머물 수 있도록 동선이 짜였다. 뮤지엄 산은 높지 않은 대신 넓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걸어야 하는 거리가 있어 언제든지 접근하기 쉬운 카페테리아의 위치가 중요했을 테다.


뮤지엄 산에 진입할 때 걸어 들어왔던 물의 정원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단이 져있는 수공간으로 뒤쪽에 자리 잡은 산맥이 폭 담긴다. 특히 가을에 아름답다.





03 비워서 만든 공간


'숨통이 트인다'라고 표현한다. 아주 답답하고 갑갑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뭔가 일이 풀리고 해소되는 때에 쓰는 말이다. 건축이라고 다르랴. 큰 공간에는 언제나 숨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뮤지엄 산에서는 아주 간단한 도형으로 숨통이 트였다.



뮤지엄 산의 모형 사진이다. 왼쪽 하늘색으로 진입로의 물이 표현되고 있고, 전시관 건물의 모습이 위에서 보인다. 사각형, 삼각형, 원의 구멍이 뚫려있다. 모형에서 뿐 아니라 진짜 뚫려 있다. 물리적으로 뻥.



사각형으로 뚫린 공간. 자동문이 열리자 오히려 내부보다 조용하다. 파피루스 온실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외부 돌로 싸인 외벽과 같은 재료로 마감된 중정이다. 사각형의 테두리로 하늘이 사각형으로 보인다.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사각형의 공간과는 다르게 삼각형의 공간은 예고편이 있다. 동선은 삼각형의 공간을 둘러싸면서 내려간다. 가로로 긴 창으로 삼각형 공간을 엿볼 수 있고, 삼각형의 예각들도 모두 날카롭게 살아있다.



개인적으로는 사각형의 공간보다 강렬하다. 파피루스가 있는 사각형의 정적이고 고요한 공간이었다면, 삼각형으로 짜인 이 공간은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여기저기 보이는 삼각형의 예각이 시각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햇빛마저도 뾰족하게 들어온다. 



뮤지엄 산에서 가장 안도 타다오다운 공간이다.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묵직하지만 날카로운 형태를 구현해 내었다. 대신 바닥은 이곳이 뮤지엄산이라는 것을 여전히 알 수 있도록 외부에 쓰인 석재를 그대로 옮겨왔다.




삼각형의 공간을 지나 원형의 공간 역시 외부의 석재로 마감되어 있다. 내부는 다른 두 곳과는 다르게 조금 더 실내인데, 아마도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되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두 곳보다 더 적은 빛이 들어온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대림 미술관 앞에 줄을 서고, 미리 예약했던 표를 들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으로 향하기도 한다. 특히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영감이나 자료를 얻기 위해 공부하는 기분으로 전시를 주기적으로 보러 간다. 작품의 사진을 찍고, 작품의 정보를 메모한다. 작가에 대해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는 일도 다수. 하지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뮤지엄 산에 온다면, 조금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들르기를. 메모할 필요도 없고, 치열하게 눈에 담아서 저장해 가야 할 전시가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좋은 자연 속을 산책하면서, 가지고 온 복잡한 생각들과 감정을 내려놓는 걸음이 되었으면.





다시 한번 방문하였을 때, 백남준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원형의 공간이 다음 전시를 준비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마침 오늘(9/22)부터 다시 전시를 시작한다고 하니, 안심하시고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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