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아키 Aug 29. 201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SSS의 HHH를 찾아서_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0


2013년, 빔과 함께 서울에서 열렸던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 때 김환기 씨의 그림들을 처음 마주했다. 각지의 미술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한 곳에 모이는 큰 전시였다. 사람이 많았고, 설명이 좋았다.


그가 보낸 인생의 시기에 따라서 화풍은 달라졌다. 도자기를 한참 그리다가, 달과 산을 엮어 그리다가, 추상화로 넘어와 점을 찍었다.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그의 삶과 함께 설명됐다. 떨어뜨리려야 떨어뜨릴 수 없도록 깊고 단단히 묶여 있었다. 김환기라는 인간에 매료되어 그 후에도 종종 환기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하고,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대구로의 여행을 계획하던 중, 노숀은 마침 우리가 대구를 찾는 그 시기에 대구시립미술관에서 김환기 전이 열린다며 함께 보러 가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자.




1



대구시립미술관은 대구 시내로부터도 꽤 거리가 떨어져 있다. 서울로 따지면,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것처럼. 대구에서 우리가 머무는 마지막 날에는 비까지 내렸다. 차를 빌리지 않았으면, 짐을 어깨에 맨 채 우산까지 들고 고생을 깨나 할 뻔했다. 김환기 전이 아니었다면, 내가 언젠가 대구 미술관에 올 일이 있었을까.



미술관에서는 전체 공간에서 하나의 전시를 하기도 하고, 규모에 따라 전시관을 나눠서 여러 전시를 진행할 경우도 있는 터라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에는 일정 규모의 빈 공간을 둔다. 보이드(Void) 공간이라고도 부르고, 홀(Hall)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공간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도 그렇고, 국립중앙박물관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뻥 뚫린 공간에서는 배경이 깨끗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잘 포착되어 사진을 찍기 좋은데, 이번에도 우연찮게 재밌는 사진이 찍혔다.



김환기 전은 사이에 홀을 두고 두 개의 전시관을 썼다. 무려 김환기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구시립미술관은 꽤 조용한 축에 속했다. 1층에서는 다른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오로지 김환기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2


좋은 전시를 볼 때면 언제나 아쉽다. 보통은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하니까. 몰래 찍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결국 고민 끝에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버린다.


나는 작업을 할 때마다 작은 노력들의 반복은 배신하지 않고 그만큼의 보상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김환기 씨의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되겠다. 셀 수 없는 무수한 점들이 하나의 패턴을 만드는데, 그 점 하나하나에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상상하면 아득하다. 


김환기 씨의 말년 작품 앞에서는 언제나 압도당하는 기분에 휩싸여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한다. 나를 둘러싼 4면의 벽에서 매우 짙은 농도의 감정과 상상이 쏟아진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 김환기, 1970년 1월 27일 일기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 씨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간단하게 그렸던 콘티가 담긴 스케치북들도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흥미로웠다. 완성작에 들어가기 전에 슥슥 그렸던 그의 연필 자국은 그림을 그려나갈 때의 그를 조금 더 상상하기 쉽게 만들었다.




3



하나의 관에서 동선에 따라 김환기 씨의 작품들을 감상하게 했다면, 건너편의 전시관에서는 그의 지난 전시들을 정리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뚫린 창으로 푸른 풍경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아 좋았던 공간.


그의 생애를 정리해 놓은 한쪽 벽부터, 그의 전시에 쓰였던 포스터와 전시 도록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봤었던 2013년도의 전시 도록도 찾았다. 전시를 보고 나와 도록을 굳이 사 모으진 않았었는데, 이번엔 좀 사놓을 걸 싶었다. 내가 가진 도록이 이곳에도 있었다면, 더 뿌듯했을 텐데.




2018년, 5년이 지나 대구에서 빔과 노숀과 함께 다시 김환기 씨 앞에 섰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였다. 정말. 너 하나 나 하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친구 빔과 친구 노숀과 함께 울산, 경주, 대구를 여행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지라, 힙하고 핫하고 헤리티지한 공간을 찾아 즐기고 싶었어요. 우리의 여행은 그래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sss의 hhh를 찾아서' 시리즈의 글들은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읽는 글이 아니라 공간을 기억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편히 읽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대청마루에 앉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