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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r 06. 2019

고요하게, 혹은 여전하게

[Still Moving], 카럴 마르턴스

후기가 너무 늦었다. 너무 좋으면, 소화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감동을 말로 풀어내기까지.



회사에서 주말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던 어느 금요일 즈음, 나는 전시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눈을 번쩍하며 회사 그래픽 디자이너 분이 추천해 주셨던 카를 마르턴스의 전시, Still Moving.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미리 설명부터 듣고 가면 좋을 것이라, 디자이너 분은 한바탕 설명을 나에게 쏟아주셨지만 결국 나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한 마디. 그러니까, 카를 마르턴스가 누구냐면 마치 건축계의 르 꼬르뷔지에 같은 분이에요! 아, 가야겠네요.


기회를 엿보다, 어느 주말 내 친구 빔과 함께 카를 마르턴스의 전시가 진행 중인 플랫폼엘을 찾았다. 우리 학동 역에서 만나 전시를 하나 보고, 점심 먹고 이동하자. 그렇게 계획을 세웠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1시간 정도 보리라 예상했던 전시를 두 시간에 걸쳐 보고 난 뒤에야 전시장을 굶주린 채 나올 수 있었다. 단연코 2018년도 한 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좋았고, 좋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꾸준함은 감동을 불러온다. 시간과 노력이 축척된 결과물은 그 자체로 언제나 탄성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전시장을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네덜란드 건축 잡지 '오아서'의 표지와 내지들에 눈길을 빼앗겼다.



아니, 잠깐. 이게 다 건축잡지라고? 표지도 모두 다르고, 내지 레이아웃도 다 다른데 이것이 하나의 건축잡지일 수 있다고? 내가 가지고 있던 잡지의 고정관념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실제로 들은 것만 같다. 정해진 기간에 한 번씩,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시장에 나와 매대 위에 올라서야 하는 잡지는 소비자에게 익숙함으로 어필한다. 이것이 바로 지난달에 읽었던 그 잡지의 새로운 호라고, 이번에도 재밌는 내용들이 있을 것이라 같은 결의 디자인으로 낯익음에 기댄다. 그것은 어찌 보면 편집계의 공식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그런데 매 호마다 그 내용에 따라 다른 디자인을 선보인 오아서의 몇십 년 간의 방대한 디자인을 한눈에 바라보니 아찔해졌다. 여기에 들어 있는 시간과 노력이 다 얼마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창작의 고통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이해하게 됐다. 전시에 대한 설명에서 카를 마르턴스의 제자이기도 한 그래픽 디자이너 그룹 '슬기와 민'은 그저 오아서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디자인 공부가 된다 했다. 그 말이 맞다.



전시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비단 그 내용만은 아니었다. 방대한 양의 작업과 자료들을 가지고 있기만 해서 훌륭한 전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순서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 전시에서는 책들을 모두 공중부양시키는 것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반 전시들이 꽁꽁 책들을 유리장 안에 가두어 놓고 한 페이지만 펼쳐 보여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과감하고, 자유롭다.


공중에 매달린 잡지들 사이를 걸으면서, 우연에 기대 손에 닿는 책들을 펼쳤다. 매달 선정된 잡지의 주제와 그래픽이 가지고 가려고 하는 시각적인 경험이 일치되어 있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규칙과 질서가 있었다. 이렇게 내가 설계한 공간을 표현해 준다면, 정말 정말 기쁠 것 같아. 그렇게 한껏 부러워하면서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 못했다.



다른 층으로 이동하자 그가 작업했던 습작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간결한 도형과 색의 배치와 배합.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설치 작품들을 건너, 그가 디자인한 네덜란드의 우표까지. 



우표 앞에서 우리는 부러움에 꽤 툴툴댔다.


"우표가 이렇게 예쁘다면, 나라도 우표를 모으고 싶겠어. 근데 정말 우표가 이렇게 예쁠 일이야? 네덜란드 사람들 진짜 좋겠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지만 좋은 디자인이 주위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기나긴 설득의 과정 속에서 '이런 것까지 꼭 해야 할까. 아무도 뭐가 다른지 알아채지도 못 하는데.'라며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시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고, 좋은 것들을 보다 보면 다시 잘 해내고 싶다. 카럴 마르턴스 전시는 그런 의욕을 다시 일깨워주었던 아주 좋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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