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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r 17. 2019

더 나아갈 곳이 없을 때까지

<굿즈모아마트>, 구슬모아당구장


1


회사를 놀기 위해 다니는 것이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왜 사냐고 물으면, 놀기 위해 산다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난 인간, 호모루덴스(homo ludens,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인간관)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나에게 휴가는 금쪽같고, 주말은 소중하다.


그러니 휴가를 비롯해 주말의 계획은 촘촘해야 한다. 오전과 오후와 저녁의 일정이 대개는 몇 주 전부터 정해져 있는 편이다. 한 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고, 이 세상에 놀 것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부지런해야 더 많이 놀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일이 계획처럼 흘러가진 않는다. 변수들이 양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빔과 내가 세웠던 오후 일정이 날아가버린 상황. 시간은 이미 어느 정도 흘렀고, 가려던 카페 문은 닫았고, 영화 시간은 우리와 안 맞고, 막연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 이제 뭐하지?" 하며 멍하니 서 있던 지난 주말.


"그럼 우리 스틸북스 가서 책을 좀 볼까?"
"그러자."



그렇게 한강진 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저 건물을 사서 고치면 예쁘겠다고, 우리가 고쳐서 건물값을 왕창 올려놓자고, 그런 시시콜콜한 야망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이제 어딘가 싶어 지도를 봤다. 현 위치 바로 앞에 구슬모아당구장이 있는 걸 보고 빔에게 물었다. 새로 전시 시작했던데, 이거 볼래? 그래! 별 기대 없이, 즉흥적으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구슬모아당구장으로 향했다.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뭔가 살 수는 있을까 회의적인 마음가짐으로 들어섰던 당구장에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장바구니에 굿즈들을 주워 담고 맥주까지 두 병 클리어하고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외쳤다. 됐어! 이것으로 여기 온 보람은 충분해! 그것은 거대한 고양이 일러스트 간판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를 간판으로 만든 작품은 흔치 않다. 빛나는 고양이들이라니! 게다가 켜켜이 쌓여있는 다른 간판들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개성이 가득하고, 하나 같이 귀엽고 재치가 넘쳤다. 재기 발랄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2


공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구슬모아당구장은 지하 3층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데, 실제로 당구장으로 쓰이던 공간을 대림미술관 측에서 젊은 아티스트들을 위한 전시의 장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는 갤러리다. 보통의 갤러리와는 다르게 지하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딱딱하고 권위적인 미술관으로 지어진 공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진행하는 전시들은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완벽히 다른 기획과 모습으로 전시를 내보인다.


* 변명하자면 구슬모아당구장이 위치한 한남동 독서당로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내가 사는 집에서도 교통편이 마땅찮아 구슬모아당구장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 때문에 구슬모아당구장이 매 전시마다 얼마나 다양하고 새로운 모습의 전시를 보여줬는지 직접 경험하지 못해 설명이 빈약할 수밖에 없어, 그 점이 안타깝다.



구슬모아당구장의 중심에는 ㅁ자의 네모난 바가 자리한다. 커피나 맥주를 팔고, 때로는 음식도 내놓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 주위를 두르고 있다. 보통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바 테이블을 공간의 중심에 박아 넣는 경우는 드문데, 구슬모아당구장 전시의 작품들은 바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번 전시인 굿즈모아마트는 여러 일러스트레이터의 굿즈들을 모아 한 자리에서 파는 전시이자 매장. 사각형의 바를 중앙에 두고 각 면에 다른 이름을 붙여 공간을 구획했다. 한쪽은 오거리 청과, 한쪽은 한남식품, 또 건너편은 한남수산. 그리고 조금 더 안쪽의 방은 유엔냉동. 어느 전통 시장에 방문한 것과 같은 이름은 이곳의 컨셉과 아이디어가 무엇이었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아, 여기 시장이구나.




3


아이디어는 본질적으로 가볍다. 어렵지 않고, 연약하고 부드럽다. 모두 뻔한 점심메뉴를 권할 때, 새로운 점심을 떠올리는 것도 아이디어. 언제나 걷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올리는 것도 아이디어. 높이가 낮아 불편한 모니터 아래에 책을 몇 권 쌓아 모니터 받침대로 사용하는 것마저도 생활 속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


작은 아이디어가 단단하고 대단한 기획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세심함과 끈기. 굿즈모아마트에 들어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았던 것은 굿즈가 너무 귀여워서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단 전시의 기획 구석구석을 살펴본 탓이 컸다.



추측하자면, 굿즈를 판다는 행위 자체로 파생된 가장 직선적인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시장이라는 것. 더 나아가 전통시장은 젊은 세대가 어렸을 때 몇 번 가봤을지언정 익숙하기엔 경험이 적을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어느 정도의 낯섦을 가지고 매력적으로 어필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으리라.


그렇다면, 이곳을 시장으로 만들자.




시장에 몇 번이고 답사를 나갔으리라 빔과 나는 꽤 확신했다. 아직도 활발히 운영되고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머물러 있는 어떤 시장들에게서 시장의 특성들을 잡아냈을 것이다. 아,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은 청과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구나. 과일박스를 쌓아두고, 과일과 야채를 옮기기 위해 사용했던 포대자루들도 여기저기 보관되어 있구나. 그러면 그렇게 굿즈들을 담자. 그렇게 박스들과 포대자루들도 하나하나 탐나는 굿즈들이 되어 전시되었다.




그 건너편, 수산시장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대가 있다. 생선들을 파는 수산시장의 디테일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아크릴로 짜인 박스 안에 작품들이 들어있어, 고개를 쭉 내밀고 아크릴 박스 안에 있는 전시물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생선이 스티로폼 상자 위에 줄지어 놓여있듯, 굿즈가 스티로폼 박스 위 혹은 푸른 아크릴 위 새하얀 조명 아래 놓인다. 이 부분에서 가장 놀라운 디테일은 조명과 함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비닐장갑. 파리를 쫓기 위해 수산시장에 종종 매달려있는 물 담긴 비닐장갑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챙겼다. 다행히 파리와 비린내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수산시장 옆, 비닐 커튼을 투과하여 새어 나오는 붉은빛이 보인다. 이곳은 정육점이다. 어딘가에서 큼지막한 칼을 들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정육점 사장님이 튀어나올 것 같이 생긴 이 공간은 정육점에서 고기를 꿰어 걸어 놓는 것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작품을 걸었다. 좋은 발견이다. 생고기의 피와 기름이 묻어도 상하지 않을 두꺼운 비닐 커튼과 생고기를 맛있게 보이게 하기 위한 정육점 특유의 붉은빛도 잘 살렸다. 이곳에서 특히 냉장고의 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더라면 더 실감 나지 않았을까.



요리에 큰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시장에 가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면, 그것은 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각종 군것질거리들 때문이라 하겠다. 광장시장에서 빈대떡과 마약김밥과 육회를, 남대문 시장에서 호떡과 갈치조림을, 그 외 다른 시장에서도 잔치국수와 떡볶이와 순대 때문에 자꾸만 길을 멈추고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는다. 이모, 여기 주문할게요.


그러니 이곳, 굿즈모아마트에서도 식품코너는 빠질 수 없다.



결국 바구니에 굿즈들을 담아 계산한 뒤,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또 어김없이 앉아 맥주를 마셨다. 굿즈를 구경하고 사기로 결심하는 여러 사람들을 안주 삼아 바라보면서, 이곳의 전시 기획에 대해 빔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전시를 기획하면 정말 재밌겠다. 곳곳에서 디테일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힘들겠지? 이런 파라솔과 장바구니 말이야. 심지어 저런 포대에도 인쇄를 할 수 있는지 몰랐어. 나도. 이 음악은 또 어떻고? 진짜 잘 만들었다.


공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던 배경음악은 전시의 감칠맛을 더한다. 분명 처음과 끝이 있는 음악일 텐데, 언제가 시작이고 마지막인지 알 수 없다. 통통 튀고, 신비롭기도 하면서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임 음악과 같은 멜로디를 가진 배경음악이 마치 이곳이 현실과 동떨어진 4차원의 시장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것이 전시 기획이든, 공간 디자인이든, 광고 기획이든, 마케팅이든 퀄리티를 올리는 길은 모두 같다.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는 것. 더 나아갈 곳이 없을 때까지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 것.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오기와 끈기가 결국엔 박수받을 만한 결과물을 만든다. 이제 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프로젝트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굿즈모아마트는 조금 더 열심히 끝까지 해야겠다는 의욕 한 줌을 건네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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