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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언제쯤 맨발로 이 도시를 걸을 기회가 있을까

걷기

by 선아키

나에게 다시 언제쯤 맨발로 이 도시를 걸을 기회가 있을까?

1


걸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가진 것은 내 두 다리밖에 없었던 때. 어쩔 도리가 없어 걷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투둑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꽤 검다. 우산, 우산. 한국 같으면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이라도 하나 사서 쓰면 될 텐데, 주변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의 한적한 주택가.


곧 스프링클러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안 되겠다 싶어 근처 아무 집 현관 아래서 비를 피했다. 어떡하지?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데? 내일 학교 가려면 신발 젖으면 안 되잖아. 당시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발이 한 켤레밖에 없던 때였다.


현관에서 우리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집주인이 나와 묻는다. 파란 눈을 가진 백인 아저씨. 비 피하는 거야? 잠시 들어올래? 당시의 나는 낯선 미국인의 집에 들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 비에 젖는 것보다 더 무서웠으므로 웃으며 거절한다. 아니, 괜찮아. 곧 갈 거야. 고마워.


비닐봉지에 신발을 고이 넣고, 양말만 신은 채로 길을 나섰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다 젖었다. 다 젖고 나니 나를 때리는 빗방울이 더 이상 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기분 좋은 파열음을 내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수영장에 온 것 같아.



양말을 뚫고 물이 내 발에 닿았다. 왠지 신이 나서 더 물 웅덩이를 쫓아 달렸다. 비는 이제껏 피하기만 했는데, 왜 아이들이 일부러 물웅덩이에 그렇게나 뛰어드는지 알겠어. 그렇게 30분을 더 걸었다. 아스팔트의 질감과, 보도블록의 요철들과, 잔디밭을 지날 때의 푹신하고 간질간질한 풀잎들이 발바닥을 통해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아, 땅은 이런 느낌이구나.


나에게 가장 선명한 걷기의 기억은 그때 , 2004년도에 머물러 있다. 아마 나는 비를 핑계로 신발을 벗어던지고 그 동네를 직접 내 살갗을 통해 느끼며 걸었기 때문에 그토록 기분이 좋았을까. 나에게 다시 언제쯤 맨발로 이 도시를 걸을 기회가 있을까?




2


잠들기가 힘들었다. 겨우 잠들었다 한두 시간 뒤에 다시 눈이 떠졌다. 숨을 쉬기 위해서 코로 깊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후 내뱉었다. 무의식 중에도 별 어려움 없던 많은 행위들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삐그덕 댔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을 일이겠지만, 때로 그것밖에 답이 없다는 것이 퍽 답답한 일이 된다.


그러다 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그들은 날 혼자 내버려 두질 않았다. 도대체 할 일들은, 갈 곳들은 왜 그다지도 많았는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끌벅적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내가 혼자 견뎌야 했을 그 시간들이 훌쩍 지났다.


그때 참 많이 걸었다. 산을 오르라고 하니, 올랐다. 의문을 던지고, 질문하는 법도 모르던 순종적이고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숨이 차기 시작하고, 다리가 뻐근하게 당기기 시작하자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나의 발끝. 내 발끝이 땅을 딛는 그 모습을 몇 시간 동안 지켜보며, 그렇게 정상까지 올랐다. 다신 이 산에 오르지 말아야지. 내 평생 다신 이렇게 산에 오를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산을 걸었다. 발바닥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지는 것처럼 욱신욱신 쑤셨다. 내가 도시에서 잠 못 들 정도로 괴로워하던 마음의 짐과 상처들은 산을 앞에 두고 그렇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게 뭐가 대수야? 빨리 내려가서 자고 싶다. 딱 그 한 가지 소원 빼고는 다 부질 없어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그 후로 마음이 괴로울 때면 걷는다. 그건 어떤 학습과도 같은 효과였을까? 걷다 보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내 마음 어디엔가 생겼다. 그때처럼 힘들게 걷진 않아도,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얼른 내 마음의 짐이 덜어지기를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때로는 큰 보폭으로 빠르게, 또 다른 때에는 좁은 보폭으로 아주 느리게.


걷는 것은 결국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산을 올라 정상을 넘어 등산을 시작했던 바로 그 출발점으로. 집을 떠나 한참을 걷다 다시 떠나왔던 바로 그 집으로. 그러나 내가 디딘 걸음걸음마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돌아올 수 있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떨어뜨리면서 걷는지 모르겠으나, 마음을 짓누르던 짐은 분명 어디엔가 잃어버리고 돌아와 조금 더 쉽게 숨을 쉬고, 또다시 머리를 기대자마자 잠이 들 수 있게 된다. 걷기에는 확실히 어떠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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