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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01. 2019

내 인생 첫 고양이

애기에 대한 기록 1

1


내 친구 빔은 대학교 어느 시절부터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름을 애기라고 지었다고 했다. 그것이 몇 년도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싸이월드를 통해 애기의 아깽이 시절을 본 기억이 남아있으니 2010년과 2011년 사이일 테다. 몸이 가늘게 길고, 유난히 머리가 작은 삼색이였다.


날 내려다보는 애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애기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는데, 어쩌다 빔의 집에 어떤 물건을 가지러 가거나 빔의 이사로 집들이를 할 때면 애기를 만날 수 있었다. 애기는 낯가림이 심하고 빔이 아니면 곁을 내주지 않아서 빔이 잡고 있을 때에만 겨우 얼굴이라도 만질 수 있었다. 그마저도 목 뒤로는 만지는 걸 싫어해 셀 수 없는 하악들을 듣고 공격도 많이 당했다. 난 그렇게 쭉쭉 늘어나는 유연한 생명체를 신기하게 바라보다 빔의 허락을 받아 츄르를 손에 쥐고 애기를 유인하곤 했다.


내 발을 베개로 쓰는 애기
캣닙에 정신 못 차리는 애기




2


애기의 특징을 꼽아보자면 유난히 얼굴이 작은 것(올해야 알게 되었는데, 애기는 토종 한국 고양이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 박스보다 비닐을 더 격하게 좋아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많다는 것이겠다.


얘가 왜 여기에 있나 경계하는 애기


다른 집 고양이들이 어떤지 당시엔 몰랐는데, 애기는 유난히 말이 많아 부르면 대답도 곧잘 해준다. 애기야! 애애용. 애애애용애용. 그렇게 애기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사실 얘는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곤 하나 애기는 그런 나의 추리에는 이렇다 할 명료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말이 많으면 천재 고양이라는데, 애기는 천재다.




3


고양이는 공감을 가장 잘 하는 동물이라고, 빔이 말하는데 나는 갸웃했다. 세상 혼자 사는 동물 같이 도도하게 굴곤 하는 고양이들에게 공감이라니? 빔이 슬픈 날이면 곁에 와 빔을 위로한다는데, 나는 그것이 그저 빔이라 평소와 같은 행동이지 않았을까 했다. (잘 믿지 않아서 미안하다.)



그러다 어떤 슬픈 날, 나는 빔의 집을 찾았는데 빔을 놔두고 내 무릎으로 올라온다. 뭐야. 너 왜 이쪽으로 오냐. 그리고선 날 핥기 시작하는데, 그건 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애기가 널 위로하네. 빔이 말한다. 이게 위로하는 거라고? 내 무릎 위에서, 내 몸 위에서 꾹꾹 날 누르며 열심히 핥는 애기 덕분에 다시 웃었고, 그 와중에 기념사진도 왕창 찍었다. 애기에게 처음으로 위로받은 역사적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잡혀 벗어나고 싶은 눈빛의 애기




4


빔과 노숀과 같이 쓰던 작업실을 빔의 이사와 함께 새로운 곳으로 옮겼다. 빔과 작업실을 함께 쓰던 우리와 빔과 집을 함께 쓰던 애기가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된 셈. 처음엔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인간들이 허구언 날 드나드는 것에 이제는 꽤 익숙해진 것처럼 보인다. 빔과 노숀과 나를 번갈아 핥아주며, 바깥에 나갔다 왔냐고 씻겨 준다. 애기 혓바닥은 까슬까슬하다.


나를 방석으로 쓰는 애기 / 새로 깐 카펫트가 마음에 드는 애기


작업실은 1960년대에나 지어졌을 법한 연립주택이라 많이 낡고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그곳을 부동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남의 집에 돈 들이는 것 아니라며) 고쳐 쓰기 시작했는데, 가장 좋은 선택이었던 것은 카펫이었다. 장판이던 바닥이 카펫으로 바뀌자, 온 바닥이 스크래처가 된 셈.


얼마나 안정되셨는지 마치 원앙처럼 발을 숨긴 애기
리듬을 타는 것이 틀림없는 애기


바닥이 카펫으로 바뀌자, 애기의 우다다가 늘었다. 갑자기 우다다 달려 주방에서 긁긁, 다시 거실로 달려와 현관 앞을 긁긁. 선정 기준은 모르겠으나, 왠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긴 하다. 항상 비슷한 곳을 긁으시니까.




작업실에 애기가 있어, 애기를 아주 자주 만날 수 있게 됐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 늘어가는 애기 사진을 한바탕 정리하다, 애기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앞으로도 더 남길 것 같아, 소제목엔 1을 붙여뒀다. 우리 사이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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