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영동대교를 건너려고 신호를 받고 있던 때였다. 퇴근시간에 쏟아져 나온 자동차들은 빨간 브레이크 등을 켰다 껐다 하며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새소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곧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으로 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소나기처럼 굵은 눈이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몇 분이 지나자, 도로 위에 눈이 쌓여 차선이 보이지 않았다.
강변북로에 진입하자 수십대의 자동차가 모두 비상등을 켜고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나도 비상등을 켰다. 모두들 뒷차에게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차선이 보이지 않자 차량들은 각자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자유롭게 움직였다. 자동차가 똑바로 줄지어 다니지 않는 것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보통 같으면 차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동차들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쓱 지나치며 속으로 욕을 할 사람들도 그때만큼은 사라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혹시라도 미끄러지거나 앞뒤로 다른 차량에 부딪힐까 봐 슬금슬금 엑셀을 밟았다. 꼭 자동차 한 대 한 대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보도에서 혹여 미끄러질까 종종걸음으로 눈을 피해 걷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눈이 내리는 날 운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발로 밟을 때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이어가 눈을 뭉개며 지나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골목은 오프로드처럼 변해버렸고, 차가 많이 흔들렸다. 회사에서 3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눈이 오면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불편하고, 사실 차가 미끄러지는 것이 위험하기도 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문을 열자, 찬바람과 함께 고요가 밀려들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올라서자, 평소보다 더 조용한 동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오면 세상은 조금 더 고요해진다. 모두가 숨을 참고 침묵하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여러 소리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러니까 에어팟 프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딱 켰을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SNS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눈사람을 만든 인증샷을 올렸다. 각자의 집 앞에서 각양각색의 눈사람(그리고 눈오리)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귀엽고 왠지 모르게 따뜻하기도 했다. 눈 오는 밤을 보낸 각종 스토리들이 쏟아졌다. 회사 사람들도 지난밤 만든 눈사람 사진을 나에게 보여줬다. 모두에게 특별한 밤이었던 듯싶었다.
그 후, 며칠 뒤에 또다시 눈이 많이 왔다. 이번엔 밤이 아닌 낮이었다. 선릉이 새하얗게 물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참다가, 조금 더 참다가 도저히 미룰 수가 없어 옷을 챙겨 입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료가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묻기에 대답했다. 저도 뭐라도 만들려고요!
나에겐 눈오리도, 장갑도 없었기 때문에 종이컵을 들고 올라가서 꾹꾹 눈을 눌러 담아 단단한 뭉치를 만들어 성벽처럼 쌓았다. 이게 뭐라고, 혼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눈 뭉치를 만들고 쌓는데 재밌다. 엄청 재밌다. 만드는 족족 사진을 찍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눈앞에서 아주 점잖은 어른처럼 의연하게 굴고 싶었는데, 결론적으론 실패했다. 회사만 아니었으면 몇 시간이고 눈을 가지고 놀았을 텐데. 아, 역시 눈이 오는 일은 신나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