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매 해 겨울마다 눈이 많이 오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때에는 지금보다 눈이 많이 내렸던 것 같다. 정강이를 훌쩍 넘게 쌓이는 날도,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날도, 눈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에서처럼 빠르게 눈을 녹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정도 많은 눈이 내리면 며칠씩 길이 얼어붙어 있었다. 겨울은 눈이 오는 계절이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할머니 집 작은 마당에 눈이 내리면 우리는 마냥 신이 났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에 마당은 온통 눈밭이었다. 삽을 들고 앞장서는 할아버지를 따라 문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초록색 삽으로 현관 미서기 문에서 주황 대문까지 쌓인 눈을 치웠고, 퍼올린 눈이 길을 따라 옆으로 더 높이 쌓이면 장갑을 두세 겹씩 낀 우리는 무서울 것 없이 마당으로 돌진했다. 갓 쌓인 눈은 두 눈을 아주 가까이 대고 보아도 반짝이고 흰 얼음 알갱이만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흰색이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색이라니. 한참을 쳐다보다 날름 혀를 갖다 대면 얼음 특유의 단맛이 났다.
그때의 나는 눈이 오면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눈 위에 드러누워 오랜 시간 하늘을 바라보고, 서로의 목덜미 뒤에 눈을 집어넣고 도망치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후드 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의 모자에 몰래 눈을 가득 채우고 휙 씌워 버리는 권법이 제일이었다. 사촌 오빠는 어디서 양동이를 구해 와서는 눈을 채우고 꾹꾹 눌러 담아 작은 집을 만들어 줬다. 뭉친 눈을 엎어 조심스레 쌓고 물을 휙 뿌려 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딴딴하고 반들반들하게 얼었다. 그 안에서 찍었던 사진이 어디에 있을 텐데. 갓 쌓인 함박눈은 하얗고 뭉쳐 던지기 좋아서, 둘둘씩 짝을 지어 열심히 눈싸움도 했다. 공격수 한 명이 계속 눈을 던지고 다른 한 명은 눈을 퍼다 끊임없이 눈 뭉치를 만들어냈다. 만들고, 사라지고, 차갑고, 흩날리고, 따갑고, 웃기고, 반짝이고, 우리는 그렇게 볼이 빨갛게 얼어붙고 콧물이 흐르는 느낌이 안 날 때까지 눈을 가지고 놀았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린 올해의 어느 날, 나는 야근을 하고 밤늦게 회사 문을 나섰다. 광화문부터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도보 확장 공사가 막 마무리되는 시기라 좁아진 시청 역 앞 도로는 고요했고, 나무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는 바람에 계속 눈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혹시라도 넘어질까 아주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온통 새하앴다. 도로의 차들은 바퀴를 헛돌며 완만한 경사를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길거리의 소화전에 동그랗고 예쁜 모양으로 눈이 두껍게 쌓이고, 나뭇가지와 차들 위로도 둥글둥글 도톰하게 눈이 쌓였다. 가만히 서서 내리는 눈 아래에 움직이는 것들을 찍고, 눈 위에 눈을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고 나서는 덩달아 조금 행복해졌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쓰러지기 바빴던 날들 사이에 아직 내가 그렇게 천천히 걸으며 많은 것들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다행스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