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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북해도의 눈밭

<눈>

by 민진킴

아, 여기다. 여길 가야겠다.


홋카이도의 겨울을 보고 비행기 티켓을 끊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보았던 홋카이도 비에이의 사진은 충격적으로 아름다웠으며, 옆 나라 일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국적이었다.


겨울 내내 따뜻한 남쪽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늘상 겨울 풍경을 보고 싶어 했다. 나의 고향에선 일 년에 한두 번 흩날리는 눈발만 볼 수 있을 뿐 발이 푹 들어갈 정도로 눈이 쌓인다는 건 5년, 아니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까.


그래서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은 나에게 판타지 속 풍경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옆 나라에 저런 세상이 있었단 말이야? 사진으로 보았던 겨울의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나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북해도의 눈밭에 도착했다.






홋카이도 비에이는 그야말로 '겨울왕국'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이었다. 여기에 도로가 있긴 했을까,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곳이었을까. 얼어버린 강 위에, 솟은 산속에, 사람들의 지붕에, 차들이 다니는 도로에 모두 눈이었다. 눈은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세상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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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눈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구름마저 짙게 드리우면 완전히 흰색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구름 때문에 세상은 어둑했지만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모를 빛은 새하얀 눈에 반사되고 있었다. 덕분에 어둑한 세상 속에서도 눈이 부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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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상은 하늘도 땅도, 내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모조리 하얬다.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흰색에도 수많은 색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 한 줄기에 '흰색'이라 명명한 그 색은 시시각각 변했고, 검은색과 흰색 사이 수많은 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무채색의 세상이라면 삭막할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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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세상 속에선 여차하면 시선을 빼앗기기 일쑤다. 하지만 눈으로 뒤덮인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는 색채가 아주 귀했다. 하얀 세상에 빼꼼히 내비친 파란 하늘, 눈 쌓인 세상 속의 빨간 자판기,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초록색의 침엽수들은 그 풍경 속에서 더욱 극적인 역할을 했다. 고요한 세상의 적막을 깨뜨리는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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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의 눈밭은 여행이 끝나고서도 내게 놀라움의 선물했다. 눈으로 보았던 세상과 필름의 입자가 포착한 세상은 사뭇 달랐다. 마냥 하얀색일 줄 알았던 사진은 생각보다 다채로운 색상을 띠고 있었다. 이게 이런색이었나? 내가 보았던 그게 맞을까? 과연 내가 본 눈은 무슨 색이었을까.

000034.JPG 필름과
IMG_0631.JPG 디지털






어느덧 서울살이 9년 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올 겨울처럼 함박눈이 많이 내린 해는 처음인 것 같다. 눈으로 보일만큼 큼지막한 눈송이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순식간에 세상은 하얗게 변한다. 바삐 움직였던 도시는 점점 느릿해지고, 건물의 옥상, 학교의 운동장,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은 하얀 이불을 덮는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항상 비에이의 겨울 풍경이 생각난다. 특히나 올겨울처럼 함박눈이 자주 내리는 겨울은 더더욱.


따뜻한 남쪽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겐 여전히 '눈'에 대한 환상이 있다. 세상엔 홋카이도와 같은 겨울왕국이 여럿 있겠지. 얼른 다른 눈세상에 가보고 싶다. 아이슬란드, 캐나다, 북유럽 아니면 북해도를 한 번 더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아- 얼른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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