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를 떠올리면 늘 연상되는 날이 있다. 때는 2004년, 15살의 나는 뉴저지에 머물고 있었고, 여름방학을 맞아 엄마와 동생 민아는 날 만나러 한국에서 날아온 참이었다. 이것은 아직 방학이 시작되기 전 어느 일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엄마, 민아와 슈퍼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슈퍼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고, 다운타운도 지나고 도서관과 운동장도 지나야 하는 길이었다. 분명 갈 땐 하늘이 맑았는데, 슈퍼에서 나와 걷기 시작하자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굵기였다.
투둑, 투둑, … 쏴아아아
허둥지둥하던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남의 집 현관 아래로 피신했다. 어떡하지? 다시 돌아가? 문 앞에서 당황한 채 작전 회의를 하던 동양인 목소리를 들었는지, 집주인이 문을 열었다. 하우스웨어를 입은 백인 아저씨는 안경 너머 파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미안해요. 비가 갑자기 너무 많이 와서요."
집주인은 곧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미국인 특유의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우리 집에서 잠깐 비를 피하겠어요?"
집주인은 문을 살짝 더 열어젖히며 제안했다. 외국인들에게 베푸는 그의 친절은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보다 더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의 제안을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아마 내가 조금이라도 더 외향적이었더라면, 또 다른 추억이 생겼을 수 있었을 테지만.
주섬주섬 빗속으로 나설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므로 신발을 벗어 비닐봉지에 넣어 묶고,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밟으며 걸었다. 다행히 뉴저지는 대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교외 마을에 가까웠으므로, 길거리는 깨끗했고 잔디는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지는 않았지만, 워낙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지고 있어서 입고 있던 옷은 금세 다 젖어버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왜인지 웃었다. 비를 이렇게 흠뻑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되는 일이라고, 별일 아닌 듯 말해주어서 홀딱 비에 젖은 생쥐 꼴이었는데도 전혀 불안하거나 걱정되지 않았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피해 다니던 물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물을 밟을 때마다 챱챱 하는 소리가 났다. 수영장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큰 샤워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를 땐 발바닥으로부터 잔디의 잎들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졌다. 비에 젖은 잔디는 꽤 미끄럽기도 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맨발 모양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계단을 올라왔을 것이다. 축축한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두고 샤워를 하고 큰 수건으로 몸을 감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옅게 지워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떤 기억들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특별한 기억들은 10년이 지나서도 생생히 색과 향을 간직한 채로 남아 있다. 언제라도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된다. 보통은 360p로 재생되는 과거의 기억들 속에 유난히 어떤 구간만 4k로 재생되는 느낌.
그 이후로는 이렇게 온전히 비를 맞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비를 떠올리면 항상 그때의 기억부터 떠오른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이면, 이 비를 몽땅 다 맞으면 어떨지 상상한다. 시도하진 않지만, 그때 그 경험 한 번으로 인해 알고 있다. 시원하고 또 간지럽겠지. 비를 맞는다는 것은 여느 드라마나 영화처럼 슬픔이 아니라, 나에겐 자유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