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이 아닌 마지막 건축
회사를 나오며 마지막으로 정리하게 된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 의미가 남달라 기록해 놓으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혹은 너무 건축적인 언어 탓에 어렵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잊을 때쯤에야 만나게 된다. 노트와 트레이싱지 위에 끄적였던 스케치가, 치수를 열심히도 튀기며¹ 그렸던 도면들이, 3D 프로그램으로 요리조리 돌려보며 시뮬레이션했던 디자인이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는 순간 말이다. 건물의 규모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들은 디자인 납품 후 1년에서 2년 사이의 시간이 걸렸다. 그제야 내가 그렸던 모습 그대로, 천막을 걷고 나타난다. 내가 설계에 적게 참여했든 많이 참여했든 실물로 건물을 만났을 때, 그 공간이 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언제나 직접 사용해보지 못하고 내어줄 때의 아쉬움이 있다.
오늘 기록할 논현이²는 2019년 8월에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해 12월에 신축허가가 났다. 테드와 함께 둘이 진행했던 설계는 6개월 정도 걸렸다. 그 후 2020년 2월에 착공했으며, 2021년 5월에 공사를 마쳤다.
¹도면 상에 치수를 기입하는 일을 '치수를 튀긴다'라고 표현한다. 공간을 다루는 사람들이 쓰는 은어 중 하나.
²논현이는 우리가 설계 단계에서 부르는 애칭 같은 것이다. 논현동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라고 프로젝트 명을 줄줄이 풀어서 부르진 않는다. 완공 이후에 붙여지는 멋들어진 이름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 논현이는 쭉 논현이일 것이다.
이건 마치 이상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 것과 같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건축가가 클라이언트에게 묻는 질문 말이다. 어떤 건물을 짓고 싶으세요? 이 건물이 어떻게 사용되었으면 하나요? 원하시는 스타일이나 재료 같은 것이 있을까요? 당황스럽겠지만 대뜸 묻는 건축가도 사실 당장 뚜렷한 대답을 듣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흡사 연애 한 번 안 해 본 사람에게 운명적 사랑을 묻는 질문이다. 본인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그 대답은 설계 과정에서 몇 번이고 바뀌곤 한다.
설계사무소를 찾는 많은 수의 클라이언트들은 건물을 짓는 것이 처음이다. 인생에 건물을 짓는 일이 흔한가? 집을 지으면 10년씩 늙는다고 하는데¹, 몇 번씩이나 건물을 지어 본 사람은 드물다. 어떤 건물을 짓기 윈하는지, 스스로 원하는 바를 모르고서 일단 설계사무소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논현이를 시작하며 클라이언트에게 받은 4장짜리 설계에 대한 요구서는 아주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설계 요구서는 4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간단한 다이어그램²과 사례 이미지들과 함께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들이 글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없었고, 놀라울 정도로 명확했다. 뚜렷한 취향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건물 디자인을 원했으며 매스감³이 있는 형태로 디자인해달라 요구했다. 이는 텍스트로도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첨부되어 있던 사례 이미지들에서도 무척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매스감이 있길 원하는 것과 창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요구는 상충된다. 매스이길 원한다는 것은 보통 벽으로 막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논현이의 모습은 일면 폐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면임에도 불구하고 각 층마다 실의 절반 정도는 벽으로 막혔다. 건물의 측면엔 아예 창을 두지 않았다. 창을 매우 중요시하는 문화에서는 내리기 힘들 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창이 없는 벽이라서 느껴지는 힘이 분명 있다.
또 한 가지 요구사항은 천연재료를 사용해달라는 것이었다. 건축 자재들 중에서는 생각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들이 많다. 무슨 의미냐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나무 무늬를 가졌다던지, 돌인 줄 알았더니 페인트로 돌무늬를 찍어낸 것이라던지 하는 화장술 말이다. 본인의 눈썰미를 믿고서 당연히 알아챌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지 몰라도,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꽤 있다. "잠깐. 이거 돌이 아니네?" 이러면서.
천연재료를 원한다는 것은 '척'하지 않는 진짜 재료를 사용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돌이면 돌답게, 금속이면 금속답게. 그래서 논현이는 전체 건물이 석재를 입게 되었다. 형태의 매시브함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재료이기도 했다. 돌은 무겁고, 단단하니까. 너무 매끈하고 얌전하기만 한 돌은 선택지에서 배제하고, 시간의 흐름이 적층 되어 쌓인 것과 같은 무늬의 석재를 골랐다. 가로의 무늬가 건물 전체를 둘러쌀 것이었다. 그에 따라 석재도 길게 켜서 자르고 오픈조인트⁴로 석재와 석재 사이의 틈을 그대로 노출했다. 본드와 실리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내부 공용부와 주차장 천장은 알루미늄 패널 3T를 사용해 마감되었다. 비용절감을 위해서 두께 1mm보다 얇은 알루미늄을 사용해서 합판 위를 도금하듯 덮을 수도 있었는데, 이곳에선 그러지 않았다. 특수 알루미늄 패널이었고, 현장에선 처음 사용해보는 재료여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3mm나 되는 두께감 있는 재료를 사용한 만큼 패널은 힘이 있었다. 평활도가 좋아 벽과 천장 모두 낭창거리거나 우글거리지 않고 판판했다.
묵직한 재료로 창을 뚫지도 않은 채 벽을 만들어 세우는 건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꽉 막힌 성채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고, 다가가기 힘든 고집 센 건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외관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게에 짓눌려 보이지 않기 위하여 논현이의 부분들은 모두 겹쳐져 있지 않다. 올라타 있을지언정, 매스가 매스를 짓누르며 합쳐지는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볍게 얹어져 있도록 보여야 한다. 언뜻 젠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선이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디자인 어휘는 추후 현장소장님을 많이 괴롭혔다.
¹공공연하게 이런 표현을 쓰지만, 조금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집을 한 채 짓는 데에 우여곡절이 많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10년 치의 괴로움은 아닐 것이다. 좋은 설계자와 시공자를 만난다면 말이다.
²다이어그램이란 개념을 쉽게 나타내기 위한 그림이다. 우리는 수학 시간에 벤다이어그램으로 집합에 대해 공부한 바 있다.
³매스라는 단어가 생소할 것 같다. 덩어리라는 뜻의 영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보통 건물의 형태가 층별로 나뉘어 읽히기보다는 특정 영역별로 구별된 공간들이 쌓여 있는 것처럼 읽힐 때 매스감이 있다고 표현한다.
⁴오픈조인트는 재료와 재료 사이에 실리콘 혹은 시멘트를 채워 넣지 않았음을 뜻한다. 보통 석재를 외장으로 사용할 때에는 사이를 실리콘으로 메꿔 빗물이 사이로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논현이는 객관적으로 큰 건물이 아니다. 층고가 높고 건물의 외관이 크게 크게 찢어져 있어서 규모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논현이는 결국 지상 4층짜리 건물이다. 하지만 작기 때문에 단순한 건물이 되라는 법이 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에겐 논현이가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하는 곳이 될 터였다. 직장인이라면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으면 어떤 답답함이 찾아오는지 모두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설계 단계에서 테드와 나는 건물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틈들을 집요하게 찾았다.
논현이의 지상 층들은 모두 실 내부에 테라스를 가진다. 도로 변이 아닌 뒤쪽, 남쪽을 향하는 테라스들이 해를 가득 받아들인다. 낮에 조명을 켜지 않아도 논현이의 내부는 그리 어둡지 않다. 관리의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테라스에는 모두 나무를 심었다. 지그재그로 돌출된 테라스의 사이로 나무가 쭉쭉 자라나길 바랐다.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온 나무의 머리카락이 그 위층에서 발견되길 원했다. 그렇게 테라스는 옥상까지 이어진다. 옥상의 조경과 함께 단이 나누어져 있는 옥상층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공용부에서는 엘리베이터 옆, 또 다른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 문이 있다. 좁은 틈이지만 여기에도 외부 공간이 있다. 논현이를 둘러싼 날개벽¹과 계단실의 벽 사이로는 마치 점프를 거듭하는 게임의 맵처럼 중간중간 바닥이 걸려있다. 양옆의 높은 벽 사이에 끼여 있는 공간감이 낯설 것이다. 하루를 여는 아침엔 벽과 벽의 틈 사이로 길게 햇빛이 들어온다. 실 내부의 남쪽 테라스를 이용하기가 부담스럽다면, 엘리베이터 옆 틈새 공간을 활용해 잠깐 쉬어가기 용이하다. 통화를 하거나, 잠깐 바람을 쐬거나. 그리고 흡연자들이 매우 좋아할 공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상 층 계단실의 참²에 위치한 남녀 화장실은 모두 외부로 향하는 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매시브함을 지키기 위해서 외부로 창을 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디자인 의도를 기억하시는지? 그래서 창을 뚫되,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창을 뚫었다. 날개벽을 사용해서다. 바깥에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바람이 드나들고 하루의 어느 때엔 햇빛이 은은히 들어온다. 감춰진 창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이다. 외부의 매끈한 석재와 대비될 수 있도록 날개벽의 안쪽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거친 재료를 썼다. 거친 텍스쳐로 인해 빛이 들어올 때면 모두 산산조각 나길 원했다.
지하층엔 선큰³을 뒀다. 건물에 진입한 후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진입하게 한다. 지하 2층까지 바로 외부 계단을 통해 내려올 수 있다. 지하 2층이어도 독립적으로 운영되기에 무리가 없도록, 접근성을 높이고 싶었다. 최대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가벼운 계단을 만들고 싶어, 계단을 모두 벽에 매달아 버렸다. 한쪽에서만 고정된 켄틸레버⁴ 계단이었다.
구조검토도 되어있는 안전한 계단임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도 계단이 처음 생기고 현장을 방문했을 땐 꽤 무서웠다. 왜냐면 한쪽에만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또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왠지 벽쪽으로 붙어 걷다가, 이제 난간도 생기고 나니 자신있게 오르내릴 수 있어졌다. 부디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기를.
작은 건물이라고 해서 전용공간과 공용공간, 실내와 실외 공간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건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누군가는 이곳에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한다. 생활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다채롭게 활용될 수 있도록, 때로는 바람을 쐬러 뛰쳐나갈 수 있도록, 하루의 빛을 다양한 각도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효율만을 쫓는 설계는 건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에겐 좋을지 모르나, 누군가에겐 직접적인 해로 작용한다. 누군가의 삶을 삭막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매스 사이의 다양한 틈들을 찾는 데에서는 클라이언트의 동의가 가장 주요하게 작용했다. 아무래도 면적을 할애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공간의 질을 위해서 일부 예산을 내어주는 것을 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한 투자였을텐데, 클라이언트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¹무게를 버티기 위해 사용되는 벽이 아니라, 오로지 외관을 위해 땅에 닿지 않고 건물에 매달려 있는 벽을 뜻한다.
²계단이 한 바퀴 돌기 위해서 중간에 넓게 한 번 멈출 수 있는 구간. 반층 정도 이동하고 나서 보통 나타난다.
³지하로 내려가는 개방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채광을 가능케하고, 환기에도 큰 도움이 된다.
⁴한쪽에만 고정되어서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조 방식을 뜻한다.
최종 도면을 납품하고 나면, 실제로 디자이너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급속히 줄어든다. 그때부터는 현장에 문제가 터지지 않기를, 장마가 길어져 비가 많이 오지 않기를, 내가 그린 도면대로 시공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어디든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현장은 없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많으면 열 번도 넘게 연락이 온다. 현장에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고는 했지만, 도면에 나와있지 않거나 도면대로 해결이 어려운 부분들은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협의하며 결정해야 한다. 최고의 방법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대안으로 디자인을 지키기 위해서다.
내가 제시하는 방법도 있고, 현장에서 제안하는 공법들도 있었다. 때로 지켜져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예산이 더 들더라도 진행을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하지만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나도 디자인적으로 양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건물의 모든 부분들에 디자인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돈이 건물에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려서 납품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포기해야 할 부분들은 고민 없이 내줬다.
서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현장에서 변경되어야 하거나 선택해야 하는 문제들이 올 때, 나는 고민을 최대한 몇 분 이내로, 빠르게 결정 내리고 번복하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타협해야 하는 것이라면, 질질 끌어봤자 손해였다.
디자인 변경은 자잘하게 여러 번 있었다. 큰 변경사항은 아니었다. 일부 재료가 바뀐 적도 있었고, 계단 난간의 손잡이 모양이 바뀌거나 일부 공법의 변경 정도였다. 현장소장님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디자인 방향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공사 중에 전화를 피하고 싶다거나, 전화가 와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둘 다 누구의 탓이라고 잘못을 씌우려 하지 않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우선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진은 내가 직접 찍었다. 회사의 배려로 회사의 준공작 사진들은 내가 찍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것이 어느 정도 이득이어서 나에게 맡겨주었겠지만, 나에게는 내 디자인을 내가 직접 기록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작가와 작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아마도 직접 사진을 찍을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부분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시공이 끝나면, 준공 사진을 찍고 나면, 임대 혹은 분양이 되고 나면 건물은 서서히 내 영역 밖으로 빠져나간다. 설계의 끝은 항상 그렇게 이루어진다. 덧붙이자면, 논현이는 어떤 회사가 사옥으로 쓰기 위해 사갔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쇼룸으로 오픈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용되고 있는 공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