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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23. 2022

두륜산 품에 안긴 최초의 여관

유선관

시작의 땅, 해남의 두륜산


땅끝은 해남인 줄로만 알았다. 사람들은 해남을 말하며 자주 땅끝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해남은 시작이기도 했다. 지도를 뒤집어 남쪽의 바다를 뒤로 하고 한반도를 마주 보면, 해남은 시작이 아닐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여관의 시작도 그곳, 해남에 있었다. 두륜산에 위치한 대흥사의 한편에서 절을 찾은 수도승과 방문객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던 곳, 그곳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신선이 노닌다고 하여 유선관이라 불렸다.



유선관이 자리한 대흥사의 터는 두륜산의 산맥이 마치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백제시대부터 터를 잡아온 대흥사의 위치는 말 그대로 폭신한 침구에 몸을 뉘이듯 산맥 사이에 편안히 자리한다. 대흥사로 향하는 길목과 숲을 따라 흐르는 계곡의 사이에서 유선관은 ㅁ자의 중정 마당을 중심으로 한 4채의 한옥으로 이뤄져 있는데, 낮은 담장 너머로 마당이 슬쩍슬쩍 보이기도 해서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가장 최초의 여관을 덧칠하기



유선관이 지어진 것은 1914년의 일이었으니, 벌써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건물의 큰 골조를 제외하면 내부의 시설이 낡고 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100년 전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이 집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유선관을 찾는 손님들은 불편함을 겪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마당을 건너 공동 샤워실과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길 원치 않았고, 여름엔 에어컨을 틀어야 했으며 겨울엔 바람을 막아 실내에서 따뜻하게 지내길 원했다. 가장 최초의 여관은 리노베이션이라는 이름의 덧칠이 필요했다.



유선관의 리노베이션은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닥에 깔린 붉은 보도블록과 조경을 모두 걷어내어 한옥이 둘러싸고 있는 마당의 공간감을 살렸다. 계곡 앞마당을 채우고 있던 장독대와 외부 테이블을 치워 계곡으로의 접근성을 높였다. 건물에 붙어있던 현판과 팻말들을 떼어내 한옥 특유의 구조가 고스란히 노출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유선관을 흐르는 물에 씻어 가장 묽은 색으로 덧칠을 시작한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나니 유선관의 한옥들을 이용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총 9개의 객실로 운영되던 유선관은 수를 줄여 현재 6개의 실만을 두고 있다. 사이에 위치해 있던 방을 고쳐 객실마다 개별의 화장실을 두었다. 이제 이용객들은 외투를 챙겨 입고 신발을 끌며 공동 샤워실과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현관으로 쓰였던 한옥은 실내화를 거쳐 새로운 객실로 재탄생했다. 기존 공동의 샤워장으로 쓰였던 한옥은 보수를 거쳐 카페로 쓰이게 되어, 이제 유선관을 찾는 사람들은 조금 동선이 길어지더라도 카페를 거치고 현관 역할을 하는 한옥을 또 한 번 거쳐 중심 마당으로 진입한다. 동선이 길어졌다는 것이 항상 단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여러 단계의 켜를 가지게 된 공간은 전통 한옥의 공간 구조를 닮아 격이 생기고, 카페만을 이용하는 외부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분리되게 한다.



마루에 올라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나의 공간을 반으로 나눈 낮은 벽과 그 너머의 침실 그리고 또 하나의 창문에게로 눈길이 향한다. 객실 내부는 아담하고 단순한 구조로 느껴질 수 있으나, 앞뒤의 창호를 모두 열어젖힌다면 더 이상 객실은 작거나 좁지 않다. 앞쪽으로는 한옥으로 둘러싸인 마당의 공간감이, 뒤쪽으로는 대륜산의 푸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넘실대는 풍경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인지하게 되는 공간의 깊이와 너비가 확장되는 경험이 단순히 창호를 몇 겹 열어젖히는 것만으로 이뤄진다.




산책, 다도, 목욕


아침에 일어나면 대흥사를 한 바퀴 산책했다.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급한 발걸음을 늦추고 두륜산의 산새와 높은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등산화를 질끈 묶고 대흥사를 지나 두륜산을 더 높이 올라보고 싶기도 했다. 등산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므로.



미리 예약한 시간이 되어 마당에 면하고 있는 스파 건물로 들어섰다. 일견 다른 객실과 똑같이 보였지만 이전의 유선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 목욕실이었다. 총 두 개의 스파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한 스파 내에는 두 개의 욕탕이 자리한다. 객실과 마찬가지로 여러 겹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마지막 문을 열면 숲과 계곡이 아주 가깝다. 스파를 이용할 때면 객실 내에 비치되어 있던 것과 같은 녹차가 제공된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으로는 가을의 숲을 바라보며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깊은 향의 녹차를 마시니 이것이 신선놀음이라 유선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싶다.



유선관에 머무는 시간들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채워졌다. 할 일이 없고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걱정은 미리 놓아두어도 괜찮다. 밝은 낮이면 다양하게 즐기게 되는 두륜산의 풍광에,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면 유선관의 팔작지붕 너머 펼쳐지는 별구경에 눈길을 주느라 오랜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월간 샘터 2022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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