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미술 작품은 오롯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마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쓰인 수많은 노트가 있고 습작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작품이 세상에 공개가 되고 나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들을 설명해 주는 텍스트와 이미지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미술관의 역할 또한 전시를 너머 작품과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저장하는 것까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4월 개관한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미술관이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그리고 관람객과 함께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고 대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관이나 도서관의 공간은 진입구와 맞붙은 로비에서 시작된다. 로비에 큰 공간인 전시관과 서가들이 연결되어 있고, 방문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 로비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떠올리는 중앙집중형의 공간 구성 방식이다.
평창동의 언덕을 따라 위치한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일반적인 미술관 혹은 도서관의 규칙을 따르기 어려운 땅에서부터 시작됐다. 도로에 의해 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가장 아래의 도로에서부터 땅의 가장 윗부분까지는 높이차가 20m 가까이 난다. 분절된 땅을 어떻게 엮고, 땅의 높이차를 어떻게 극복해질 것인지가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땅의 특성에 의해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중심이 없는 미술관이 되었다. 공간을 용도에 따라 쪼개어 땅에 흩뿌리듯 올려놓았다. 땅을 깎아내는 대신 지형에 순응하여 언덕이 높아짐에 따라 건물도 함께 높아진다. 모음동과 배움동, 나눔동으로 이뤄진 세 개의 건물에는 위계가 없다. 각자 다른 용도로 쓰일 뿐이다. 관람객은 서울시립아카이브를 방문하며 길을 건너고, 경사로를 통해 이어지는 옥상 정원을 통하며 공간을 옮겨 다니게 된다. 도시 안에, 동네 속에 미술관은 위화감 없이 섞여 녹아든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전면은 모두 유리창으로 덮여있지만, 안이 들여다보이진 않는다. 상부는 철망이 마치 블라인드처럼 내려와 있고, 하부 유리창은 외부로 노출되어 있지만 짙은 유리창의 색상 탓에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은 천장의 조명뿐이다. 곧이곧대로 빛을 모두 들이지 않는 건물의 외장 때문에 내부가 어두울 것이라 지레짐작할 수 있겠지만,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환히 빛나는 공간의 조도에 놀라게 된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공간을 가장 빼어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모음동의 레퍼런스 라이브러리가 위치하고 있는 라운지 공간이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에 수집된 4500여 권의 책들을 열람하며 방문객들은 자유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외부에선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철망과 짙은 유리창은 내부 조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부로부터 충분한 빛이 들어오고, 사각 와플 모양의 패널 뒤에 설치된 천장 조명들은 햇빛과 더불어 공간의 조도를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빛은 고루 퍼졌고, 덕분에 두 개층으로 시원하게 뚫린 공간감이 빛을 발한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내부 공간은 화이트 색상을 바탕으로 하여 군더더기 없이 깔끔히 마무리되었다. 공간에 무언가를 더해 꾸며내거나, 덧대는 것이 없다. 바닥과 벽은 재료가 나뉘는 선이 보이지 않도록 매끈한 면으로 칠해졌다. 천장도 안쪽으로 조명과 설비들을 모두 넣어 하나의 면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추후 공간을 채울 수집품들을 위해 크고 널찍한 캔버스가 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건축의 단계에서 백색의 캔버스를 놓아두자,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필수적인 가구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미 판매되고 있는 기성 가구들을 사는 대신,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내부를 채운 가구들은 모두 이곳만을 위해 새로 디자인 되어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에 자리한 서가는 중간의 가림막이 없다. 책이 꽂히지 않은 부분들은 시야를 가리지 않아 서가 너머의 공간이 인지되도록 한다. 라운지 내의 가구들도 건축이 그랬던 것처럼 필수적인 구조만을 사용해 간결하게 디자인되었다. 전체적인 내부 색감과 어우러지는 옅은 회색의 등받이 의자들과 함께 일부 나무 소재의 스툴과 테이블이 추가되며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방문객들은 공간을 돌아보며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포스터를 보게 되고, 리플렛을 집어 들게 된다. 이때 발견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로고는 영문자 S가 변형된 형태로, 깨끗한 선으로만 이뤄진 곡선은 지면 위에서 공간과 가구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내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시각디자인이 그렇다.
이토록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은 단순히 한 명의 디자이너가 훌륭했던 것이 아니다. 건축가가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말하기에도 어렵다. 건축과 가구, 그래픽 등 여러 분야의 디자이너가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들이 깔끔한 디자인 뒤에 숨어있다.
전엔 다른 나라의 미술관과 도서관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공간이 생길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공간이 만들어지기를 항상 바란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를 돌아보니, 정말 오랜만에 망설임 없이 좋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공 건축이 생겨났다.
샘터 2023년 6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