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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y 08. 2023

비우기 위한 장소

트리비움

비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일상 속에서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것도, 진로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지우는 것도, 하다못해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조차도 어려워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한다. 요가를 통해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거나, 명상을 통해 내면과 바깥의 경계를 인식하며 생각을 덜어내거나, 격한 스포츠를 통해 작은 생각의 조각들을 날려버리거나. 각자에게 맡는 적절한 방법이 분명 있다. 건축도 비움을 도울 수 있을까.


건축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얼마나 비워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언뜻 빈 땅에 많은 것들을 채워 넣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많은 건축가들은 비워진 공간을 만들어 내려 노력한다. 꽉 채워진 땅을 먼저 상상하고, 어디를 비울 것인지 고민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렇다면 평택에 자리한 명상센터인 트리비움은 무엇을 어떻게 비워냈을까.




솔직하고 담백하게, 비워서 채우고자 하는 것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도로와 반대편에 있는 입구에 다가가면, 뻥 뚫린 건물의 형상이 보인다. 큼지막한 간판도, 이곳이 어떤 곳이라는 안내 표지판도 없이 조경과 바닥에 얕게 깔린 물길이 자연스레 걸음을 유도한다. 시선을 빼앗는 방해물 없이 깨끗한 흰색의 벽과 세심하게 가꿔지고 있는 조경과 하늘을 비추는 바닥의 수공간이 합쳐지니 훌쩍 우리나라를 떠나 여행을 온 것처럼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걸음을 옮겨 공용공간으로 들어서면 낯선 감각은 한 층 더 확대된다. 건물의 외부이기도 하고, 내부이기도 한 입구는 말 그대로 비워져 있다. 로비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웨이팅 공간도 아니다. 정면엔 건너편의 산자락이 마치 거대한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거대한 와플 구조의 콘크리트 천장 사이로는 햇빛이 천장을 통과해서 바닥에 내린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단정한 공간에서 와플 구조의 콘크리트 천장은 언뜻 장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숨김없이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천장은 오히려 공간 내부로 들어오는 자연의 자유로움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정해진 답이 없는 공간인 동시에 이곳의 언어는 솔직하고 담백하다. 직설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은 의도적이다. 방문객들로 하여금 내부로 들어서기 전,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하고 있다. 원하는 장면을 담아낸 창을 통해 펼쳐진 그림 같은 산새를 오래도록 관찰하고, 와플 구조 사이의 뚫린 개구부를 통해 들어와 움직이는 햇빛을 바라보고, 바람에 얕게 흔들리는 물살에 눈길을 달라고. 비워둔 대신 점점 초록빛으로 변화하는 산과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비워진 자리를 채운다.




아주 얕은 물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비움 외에 트리비움을 관통하는 또 다른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공간 곳곳에 담겨 있는 물이다. 트리비움을 이용하는 내내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찰랑이는 물과 계속 함께한다. 입구에서 건물에 둘러싸인 수공간을 통과하며 처음으로 얕게 차올라 있는 물을 만난다. 건물을 반사하여 단지 2개 층만이 드러나 있는 건물의 외형에 수면에 반사된 상이 더해져 훨씬 깊이 있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진입부의 공용공간에선 콘크리트 천장 개구부 사이의 하늘을 땅에 맺히도록 만드는 수공간이 있다. 크진 않지만 땅에 놓인 거울처럼 하늘과 햇빛을 그대로 담아낸다. 옥상으로 올라서면 마치 퍼즐처럼 가운데의 개구부를 제외한 부분이 모두 물로 채워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높이 솟아오른 옥상의 벽은 주변의 환경을 일부러 차단하여 오로지 보이는 것은 언덕처럼 둥글게 곡선을 이루는 산새와 하늘, 그뿐이다.



진입부보다 한 층 아래, 명상을 위한 실내 공간이 있다. 때로 명상을 하기도, 요가 수업이 열리기도, 혹은 강연과 같은 행사가 이뤄지기도 하는 곳이다. 특정 행사가 없다면 방문객들은 이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등받이가 있는 쿠션을 가지고 와 창을 향해 앉아 바깥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도 하고, 책을 가지고 와 읽기도 한다. 요가 매트를 깔고 잠깐 누워 몸을 푸는 것도 좋다. 창문 너머에 있는 테라스에는 다시 한번 수공간이 등장하는데, 수공간에 햇빛이 비쳐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천장에 맺히기도 하고 바람에 따라 흐르는 물결이 눈에 띄기도 한다. 



물을 가까이 둔 것은 자연을 조금 더 깊이 내부로 들이기 위함이었을까. 흐르는 물결 위로 가지고 온 생각의 덩어리들을 흘려보내라는 뜻이었을까. 공간의 의도를 100% 정확히 알아챌 수야 없겠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수공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





멋진 공간은 이 세상에 많지만, 다시 와보고 싶은 공간은 그보다는 훨씬 적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산수화를 담아내고 있는 트리비움에는 다른 계절이 찾아왔을 때 다시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비가 내려 수공간의 물이 온통 찰랑이고 공간에 물소리가 가득 울려 퍼질 때, 가을이 되어 산이 온통 붉고 노란 물이 들었을 때, 눈이 내려 모든 것이 새하얘지고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그럴 때 트리비움에서 우리는 아마 지니고 온 무언가를 내려놓고 또 다른 일상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샘터 2023년 5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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